I wanted a car. Every night on my computer monitor, I would gaze at countless automobile advertisements and the colorful paints they came in, before dozing asleep. It was one of those nights that it struck me that the countless iterations of mouse-over movements were like long-unanswered rituals for rain. The primary color cloths attached to the tree intended to summon a deity, in my eyes, looked like flash-ads on the monitor screen. In my wish for smooth spending, I was putting a spell on the computer and the product I wished to purchase. I didn’t scoop up a clear bowl of water in the morning to pray over it, but the monitor and I seemed to exist to worship the “god of consumption.” I didn’t do the rain dance, but I sure did feel like it looking at my check account. I claimed to be atheistic, but sans the image of Shin Saimdang on my wall, I was deifying a god named consumption.



God appears in many forms within the consumption ecosystem.

There is a restaurant I frequent. The owner claims not to subscribe to any religion. However, the hall is decorated by a gilded 50-thousand won bill made from plastic, displayed like a holy relic. The large-denomination bill placed where the typical Caucasian face of Jesus ought to be. When asked about its significance, the owner simply replied that he did it in hopes of “striking it rich.” He then added that he was “getting a Mercedes” once he was rich. His comment reminded me of that one song that had lyrics implied that “Jesus doesn’t like 1-thousand won bills.” Such fervent desire for consumption seemed unlike a monotheistic religion or a faith based on shamanic fortune-wishing. It was polytheistic, maybe even pantheistic; anything that can be subject of consumption could be worshipped and enshrined. And by extension of that attitude, mass-produced plastic would make a great deity. As a result, animistic mindset displaced from the desire to consume manifested as a prerequisite for survival. From an evolutionary perspective, all life form evolved through competing against its own kind, to survive as a species. Looking at the present consumer ecosystem from that evolutionary perspective, it is highly similar to competitive consumption for the purpose of semiotic-value caste system. This was summarized quite well by Barbara Kruger’s proclamation, “I shop therefore I am.”


Black minute numbers become an anonymous scapegoat through a dance rising from the TV. 

When the screen is switched on, a magician whose colors change every several seconds recites spells. 
The glass surface emits light and then, fancy stains smear on the crumpled face of a squid, 
And hypnosis of ineffaceable light offers a one-time short journey. 
Vivid-colored particles emerged from the screen increase a color spectrum in a somber space as if water ripples spread. 
A voyage of elegant waves gifts a white elephant mask, and anchors off on an isolated stage beyond the horizon. 
Like a dream’s mass on the verge of collapse, the stage attracts all extravagance, and the heroin wearing the white elephant mask dances on the stage. 
Until the light of the screen flooded on the stage disappears.  


The Struggle of Existence

Gazelles are standing around, when suddenly, they jolt and bound away. Running in a frenzy at to the sudden appearance of a lion, a gazelle falls prey. Not fit enough to survive, the gazelle is dragged around in the dust in the lion’s maw, like a ragdoll. I was watching the channel, comfortably lounging between warm bed sheets. I felt bad for the abrupt end to the gazelle’s life, but there was also a morbid curiosity as to what the meat tasted like. From an evolutionary perspective, intra-species competition for survival is only fair, but it did seem rather cruel.

Then a curious though came to me, “what if Seoul was a safari? How would its inhabitants fight to survive?” What would it take to stay ahead of the rest, and make feasts out my neighbors Survival of the fittest seems cruel in a safari, but as the consumer-ecosystem already dictates victors and failures based on an individual’s capacity for consumption, a safari-like scenario was not too far off.





None are exempt from participating in today’s consumption ecosystem. Urban Creature starts from that public sentiment found in consumer society. That is to say, the public sentiment is manifested in the era’s ecosystem. Urban Creature is newly created organism created by individual thought, a new form emerged from an ordinary young man’s expression of inferiority. It was visually presented, created through the repeatedly single-serving practices of consumerism society in addition to the suffering of self-alienating psychology.

Disposal plastic bags were chosen as material, for plebian-ness, ease of procurement, and their symbolization of basic packaging in the consumption cycle. Urban Creature is an individual’s assimilation into a consumption ecosystem for the purpose of being 'normal' by making 'normal purchases'. The average individual existing by means of purchase, becoming an 'urban creature' through the process is not necessarily by the individual’s volition. It is simply a basic lifestyle required to live a life as the most ordinary being. That is to say, the Urban Creature within the ecosystem of consumption is not about capturing a positive message nor a negative one. As can be identified by the outward appearance of the Urban Creature, it was artificial; it did not exist naturally. The freakish appearance of the creature is a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contemporary individual who maladjusted to consumer society, alienated and experiencing somatically manifested social disabilities. This draws attention to how abnormally formed suffering, formerly

nonexistent, can happen in consumer societies. In conclusion, within the consumer ecosystem, the Urban Creature exists as a visual representation of an ill-designed social fabric, a new creation mis-incarnated.






차가 갖고 싶었다. 모니터에 비치는 다양한 색상의 여러 개 광고와 차를 밤마다 짧게 보고 잤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하는 마우스 질이 응답없는 기나긴 기우제를 지내는 기분이었다. 신을 부르기 위해 나무에 휘감은 원색의 천이 모니터 화면의 수 많은 광고창처럼 보였다. 나는 원활한 소비를 하고 싶은 마음에 컴퓨터와 상품에 주술을 거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물을 그릇에 담지 않을 뿐 모니터와 나와의 관계는 소비라는 신을 모시기 위한 행동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감 속에 작두를 타지 않지만 통장 잔고에 긴장하는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무신론을 자처했지만 신사임당을 벽에 걸어 놓지 않았을 뿐 결국 소비라는 신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신은 소비생태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보인다

단골집 사장님은 종교는 없지만, 금빛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만원권 그림이 가게에 성물처럼 장식되어있다. 보통 잘생긴 백인의 예수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오만원권이 모셔진 이유에 사장님은 “돈 많이 벌고 싶어서 놔뒀다”고 하셨다. 그리고 “돈 많이 벌면 벤츠를 살거”라고 하셨다. 그 말은 마치 천원짜리 헌금은 주님이 싫어하신다는 식의 가사로 회자되는 한 찬송가의 구절을 떠올렸다. 이러한 소비욕망은 유일신 종교나 단순 기복신앙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소비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모든것이 신을 모시는 장면처럼 보였다. 그럴 경우 대량 생산되는 플라스틱도 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소비욕망에서 치환된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이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보였다. 진화론적으로 바라봤을 때 모든 생명체는 동종과의 경쟁을 통해 집단을 생존시키기 위해 진화했다. 이러한 생존경쟁을 지금의 소비생태계에 적용해 본다면, 기호가치로 만들어지는 신분제를 위해 경쟁적으로 소비를 하는 행태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구가 의미하듯 말이다.


위장된 북어

자주 가는 단골 조명가게에는 화려한 조명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붉은 북어가 벽에 매달려 있다.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그리고 다시 붉은 색으로 변하는 북어는 화려한 위장으로 먼지뿐만 아니라 냄새와 못생긴 얼굴까지 숨긴다.

쇼윈도 유리창 넘어 화려한 상품의 관성을 납품하는 조명가게의 빛은 북어를 가짜 플라스틱 박제로 상품으로 만들었다. 사장님은 북어의 의미를 물어보면 짜증을 내셨다. 그런 작은 기복장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단지 가게 내에 플라스틱으로 된 여러 기복장치 중 유일하게 위장된 생물일 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공원 나무사이로 보이는 붉은 십자가와 세븐일레븐 간판의 색상조화는 많이 예쁘다.

성황당처럼 보이는 예쁜 장면은 소비라는 무형의 질량이 만들어내는 중력의 파장이 주변의 시공간을 화려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의 생태계는 거대질량의 탄생에서 시작한 빛의 입자가 모든 것에 상품성이라는 질량을 부여하며, 빛의 우아한 색상이 부딪히는 일대를 화려한 왜곡으로 만들어버린다.

내 눈 앞에 명료하게 속내를 밝히는 쇼윈도 유리 안에 팽창하는 다채로운 조명의 빛은 일대에 닿는 생물들에게 자기장의 파동처럼 신경계 전류에 손상을 주고, 그들을 소비되어야할 가짜 플라스틱으로 위장시키며 오작동 하게끔 만드는 듯 보였다.

흑색에 깨알같은 숫자는 티비에서 뿜어지는 춤사위로 이름없는 재물이 된다.

깜깜한 작업실에서 화면이 켜지면 몇초마다 바뀌는 원색의 주술사가 주문을 뿜어낸다.

유리화면이 빛을 발하면 쭈글한 오징어얼굴 위로 화려한 얼룩이 묻고,

지워지지 않는 빛의 최면은 일회성의 짧은 여정을 제공한다.

화면 밖으로 나오는 원색의 입자는 물결처럼 칙칙한 작업실 공간에 알록달록한 수위를 높인다.

우아한 파동의 향해는 지평선 넘어 흰 코끼리 탈을 선물하고 외딴 무대 위로 정박한다.

무대는 금방 붕괴될 꿈의 질량처럼 모든 화려함을 끌어당기고, 흰 코끼리 탈을 입은 주인공은 무대 위에 서서 춤을 춘다. 무대에 쏟아지는 화면의 빛이 꺼지기 전까지.


공포는 눈에 보였다.

만질 수 있었고 심지어 냄새조차 맡을 수 있었다.

어릴 적 공포는 단순했다. 선생의 구둣발과 몽둥이.

바닥에 얼굴이 짓눌릴 때 공포는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물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공포의 힘은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고 신체에 가혹도 욕설도 없이,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방전될지 모르는 두려움.

은행에 들어가서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여분의 배터리 잔량을 확인한다.

과거에 여러 번 신체를 방전한 경험 때문인지, 불안감의 습관으로 아이폰에 붉은 배터리잔량을 참을 수가 없다.

만질 수 없는 비 물질의 동력인 숫자는 팽창과 수축으로 물질에서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제압해버렸다.

비 물질이 주는 압력은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기형적 고통과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일회성의 반복된 소비작동이 방전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자본가를 위한 노동도 나를 위한 노동도 아닌 비 물질의 수축이 가져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한 노동을 가져왔다.

언제 어디서 방전된체 방치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소비생태계의 작동과 형태

지금의 소비생태계에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자연의 무질서는 응축된 자본에 가까워질수록 정리된 모습으로 박제화 되며, 시세유지를 위한 도구로 장식된다. 생태계 시스템은 교체됐고, 자본에 의한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 졌다. 소비라는 동력이 있어야만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지금의 생태계는 캄브라기 시기 폭발적인 종의 탄생처럼 다양한 상품형태를 쏟아내고 있다.


종이 경쟁적으로 종을 섭취하며 성장하는 진화론적인 과정처럼 소비생태계는 동종과의 경쟁으로 상품을 소비해야지만 생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놨다. 소비동력으로 신체를 작동해서 경쟁적으로 상품을 섭취해야만 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도태되고 부실한 신체작동을 걸러내는 과정 만들어 낸다. 도태되어 원활한 소비작동을 할 수 없는 신체에 대한 태도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소비생태계에 대한 악의적 질문과 생태계를 기형적인 장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소비생태계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바탕이 되는 것은 소비사회에서의 심리다.

생명체의 모습들은 소비사회에서 만들어진 일회성 소비들과 반복된 형태, 행동 등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만들어진 일상속의 심리적 고통을 작업노트로 정리하며 시각화한다.


반복된 소비작동에서 기초가 되는 매질로 존재하는 사물인 일회용비닐은 소비생태계에서 등장하게 된 생명체 작업에 주로 사용되는 재료이다. 일회용 비닐은 흔한 가짜 플라스틱 형태의 소비상품을 담고 반복된 소비행위를 대표하는 사물이며 지금의 생태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매체로 보여진다.

생명체작업에 피부로 부착되어 불규칙한 면으로 빛을 반사하는 필름지는 비닐과 함께 생명체형태를 이루고 있다.

신체 스스로 소비될 수 있는 왜곡된 장면의 모습을 반사필름지로 시각화 하고 있으며, 생명체 내부로 비물질인 공기의 압력으로 팽창되며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비물질인 자본의 팽창과 수축은 사람들의 신체작동에 제약을 준다.

지구 반대편 FRB의장의 말 한마디는 수축될지 모르는 비물질의 공포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팽창과 수축의 공포는 나아가 물질의 팽창과 수축을 가져온다. 그렇기에 도시라는 거대유기체의 움직임은 화석연료의 물질이 아닌 숫자로 구성된 비물질의 압력으로 생존한다.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압력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숙주가 되어 신체의 원활한 작동을 연결한다. 그렇기에 소비생태계에 등장하는 생명체 작업에 팽창과 수축의 반복으로 나타나는 움직임의 원리로 사용되고 있다.

과도한 소비질량으로부터의 공간왜곡.

도시는 화려한 빛들로 일대를 수놓는다. 도시에서 빛은 단순한 시야확보가 아닌 상품성을 팽창시키는 장치이다.

원색의 강한 입간판 빛들과 쇼윈도의 빛나는 조명은 공간을 주목하게 만든다. 조명으로 주목된 공간은 보이지 않는 관성으로 물질들을 끌어당긴다.

지금 생태계의 빛들은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입자처럼 빛이 닿는 공간 곳곳에 소비질량을 부여하여 상품성을 팽창시키고 있다. 경쟁적으로 사용되는 화려한 조명은 빛이 닿는 일대에 과도한 소비질량을 부여하고 있다.

작은 조명장치들은 무거운 질량으로 공간을 왜곡하는 왜소한 중성자별처럼 도시공간의 장면들을 뒤틀고 있다. 상권에 장식된 식물들은 원색의 조명을 받으며 상품성을 부여받고 사람들 모두 확장된 상품성의 공간에서 활보하고 있다.

공간에서의 상품성 팽창은 대지에 막연한 기대를 불어 넣는다.

보이지 않는 초거대 질량인 블랙홀은 주변의 물질을 흡수하고 데이터만 남긴다는 가설이 있다.

시각적 정보 없이 데이터정보만 기록되는 보이지 않는 거대 질량은 도시의 개발과 유사한 과정을 보여준다.

텅빈 대지에 신도시개발은 거대한 사탕처럼 보이는 투자현수막을 배출하고, 동네는 해처리의 크립처럼 대지가 확장되어 개발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낳는다.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땅은 일대에 강력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겨 공간을 왜곡하는 장면을 만든다. 그래서 비물질의 압력으로 팽창하는 생명체 작업에 사용되는 반사필름은 불규칙하게 비춰지는 화면의 특성으로 주변 공간이 왜곡된 형태로 보이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소비질량에서 신으로.

과거부터 신이라는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면서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힘을 가진 존재였다.

유발하바리는 사피엔스의 생존과정에 신이라는 필수적 요소가 있었다고 말한다. 자연계에서 비교적 약한 종인 사피엔스는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절대적 힘을 믿음으로서, 다른 종들의 일반적인 소규모 공동체를 압도하는 규모의 집단화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발달된 문명은 신의 도덕이 아닌 법치로 작동하는 공동체이기에 사실상 신의 존재이유가 사라졌다. 하지만 사피엔스의 진화과정에서 경험된 비물질적인 신은 생태계가 교체된 지금도 보이지 않는 힘을 사용하며 공동체의 시스템을 움직이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광고판들 사이에 붉은 십자가가 밝게 빛난다.

신의 홍보는 상권의 입간판, 쇼윈도의 밝은 불빛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

소비사회에서 신은 소비행위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면들로 소비되고 있다.

그래서 일신론에 입각한 집단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이지만, 미국재무부는 신의 모습처럼 말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의 소비작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소비생태계에서 동종끼리의 생존경쟁을 초래하여, 기복적 사고의 애니미즘 현상을 만들었다.

과거 대지의 풍요를 위해 토지의 신을 부르는 방법의 장치였던 원색의 천들이 나무를 휘감은 모습과 대지에 울리는 만신의 방울소리는 지금 생태계에 형태가 바뀌어 등장하고 있다.

원색의 투자현수막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나무를 감싸고 있고, 상가의 사운드와 그리고 명당의 복권집은 가지각색의 현수막과 간판으로 기복적인 성황당의 이미지를 대신하고 있다.

다양한 기복장치들을 소비생태계에 시각적으로 연출하는 작업으로 원색의 엘이디 점멸장치를 사용한다.

상권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화려한 조명장치는 원색의 성황당이미지와 유사해 보이기에, 소비생태계에서 원활한 소비작동을 염원하는 장면으로 차용되고 있다. 염원에 매개체인 만신의 이미지는 스피커를 이용한 방울 사운드로 진행하여, 시각으로 완료되는 신을 부르는 장면이 아닌 사운드장치로 신의 행위를 확장하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웨딩홀과 쇼핑몰에 화려한 치장으로 사용되는 플라스틱 꽃들은 만신의 집에 장식된 지화의 맥락을 사용하여 생명체작업과 함께 연출된다.








2019, Standard model, (B39), BUCHEON​

Byungchan Lee talks about the weight of capital through this exhibition. He attempts to visualize an unpredictable tendency of commodities’ value, its chaotic aspects and energy flow in the phenomenon he has experienced. 

Lee produces giant creatures made of plastic bags to metaphorically demonstrate capital and markets. Although the plastic bags are not expensive materials, Lee’s plastic organisms distort their own value by decorating themselves with glamorous lights and constantly attracting viewers’ attention. As consumers absorb inaccurate information, they often make irrational decisions. Being hung high, Lee’s vinyl inflated by air seemingly overwhelms the audience, however, it actually is a fragile medium which can be easily destroyed due to its low tensile strength. The creatures revealing a certain anxiety remind us of few noticeable financial incidents such as the Great Depression of the 1930s occurred in the midst of an economic boom, the worldwide financial crisis in 2008 which unveiled an illusion developed by the market’s inefficient and corrupt system, or most recently, the tremendous public interests in Bitcoin.  

Particular elements of Lee’s installation including a metronome or water suggest that the financial market influenced by several variables unpredictably operates. The metronome and water ripples allow viewers to directly perceive waves delivering energy with their eyes or ears. Especially, the offbeat sound of the metronome confuses the spectator’s senses and it ultimately becomes a crucial factor depicting the portrait of general people who live in a complex system. As diverse unforeseeable elements and situations have a great impact on our decision-making process in various ways, this process relies on not only our rationality but our intuition. Thus, we sometimes can not distinguish intrinsic values and justificatory reasons, and moreover, overreactions or negligence can appear in the course. The perceptional bias based on irrationality consequently creates arbitrary streams of capital, instead of maintaining a state of equilibrium that classical economists had discussed. Furthermore, the red light is a device demonstrating redshift—a phenomenon that electromagnetic radiation from an object undergoes an increase in wavelength (human perceives longer wavelength as red). By adopting the notion of redshift in which wavelengths of light are extended by a gravitational field, Byungchan Lee explains capital’s weight and mass.

The swing performance introduced in this exhibition originated from his personal experience. Lee mentioned that he wanted to manifest a certain sensation of non-gravity he sensed while swinging and looking at the dark sky in the middle of the night. When potential energy is transformed into kinetic energy, people on a swing can detect changes in the normal force applying to them; accordingly, they sense variation in their weight. Lee adopts this experience to describe capital in the present era. In other words, Lee explains how a sense of capital’s weight shifts by displaying the pendulum motion of the swing. In fact, the act of swinging can not make an actual difference of weight or a decrease in gravity, but a sensation of zero-gravitation occurs when the normal force declines while the swing descends from top to bottom. The situation implies that capital grows without actual grounds and it suddenly disappears, and moreover, it portrays humans making irrational and inadequate decisions based on only the superficial impression of capital. The deliberate employment of fake flowers decorating the swings attracts the audience’s attention, and at the same time, it denotes that inaccurate information is rampant. Also, the swings stand for the pendulum movement of a clock. Through this performance, Lee intends to manifest not only energy flows but time lapses. By implementing the sound of brass instruments, he encourages the spectators to experience musical waves equivalent to energy streams. Constantly stimulating their vision and hearing, the performance enables them to experience the waves reflecting transmitted energy. At the same time, it visualizes sequential features of capital’s weight shifting itself responding to time.

In conclusion, the exhibition presents the turbulences of capital dominating the world. Byungchan Lee’s flamboyant and colorful practice investigates the weight of capital and flows of energy, and it embodies an image of humans who make absurd decisions in the vortex of diverse outpouring information and complex phenomena in the present capitalistic market. 


30 June 2019, In Milan 
Kim Gukjin




이번 전시에서 이병찬 작가는 자본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느낀 재화 가치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그 속에서의 혼돈, 그 사이에서의 에너지의 흐름에 대해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이번에도 비닐봉지를 사용한 거대한 크리쳐를 통해 자본과 시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비닐봉지는 사실 그렇게 값비싼 재화가 아니지만, 자기자신을 화려하한 불빛으로 꾸미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시각을 끌어당기며 자기 자신의 가치를 왜곡한다. 소비자들은 결국 이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비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공기로 부풀린 비닐은 일견 관객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높이 매달려 있지만, 사실 비닐봉지는 인장강도가 높지 않아 언제나 쉽게 찢어질 수 있는 약한 재료이다. 이런 불안함을 가진 크리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경제호황 중 터져버렸던 1920-30년대 경제 대공황, 금융권의 자본놀음에 의해 부풀려진 허상이 무너져버렸던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 가깝게는 비트코인 열풍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또한 메트로늄과 바닥에 설치된 물 등을 통해 이 시장에는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하고 시장이 이들에 의해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트로늄이나 물위에 이는 물결은 관객들이 매질을 통해 에너지가 전달되는 현상인 파동을 눈이나 귀로 직접 느낄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특히나 엇박으로 울리는 다양한 메르로늄의 소리는 관객들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이 것은 복잡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된다. 우리 주변의 다양하며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은 우리의 의사결정과정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합리성 뿐만 아니라 비합리성에 의거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때로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기도 하며 때론 과소/과잉반응을 하기도 한다. 이런 비합리성에 기초를 둔 인지적 편향은 결국 기존 고전경제학이 이야기했던 균형상태를 거부하며 예측 불가능한 자본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또한 붉은색의 불빛은 물체의 빛의 파장이 길어지면서 물체의 스펙트럼이 긴 파장(적색) 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인 적색편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장치이다. 그는 이를 통해 특히 중력장에 의해 빛의 파장이 늘어나는 적색편이를 표현하고자 하며 자본의 질량과 무게를 설명하려 한다. 
이번 전시의 그네 퍼포먼스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탄생한 것이다. 한밤중에 하늘을 바라보며 그네를 탈 때 순간 중력이 사라지는 느낌을 전시에 담고 싶었다고 한다.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네위의 우리는 수직항력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체중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이 경험을 현대의 자본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그네의 진자운동을 통해 자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네를 탄다고 해서 중력이 사라지던가 질량이 변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네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수직항력의 감소가 일어나게 되며 이를 통해 잠시 무중력 상태의 느낌을 받을 뿐이다. 이는 실체를 알 수 없이 성장하다 사라지는 자본의 모습을 보여주며 또한 실체를 알 수 없어 자본이 주는 느낌만을 받아들이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설명한다. 조화로 화려하게 꾸며진 그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의도적인 가짜 꽃의 사용으로 왜곡된 정보의 전달 또한 설명한다. 또한 그네를 통해 그는 진자운동을 하는 시계추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에너지의 흐름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 또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번 퍼포먼스에서 금관악기의 소리를 추가하며, 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청각을 통해 에너지의 흐름인 파동을 체험하게 해주는 또 다른 장치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 퍼포먼스를 통해 그는 관객의 시각과 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에너지가 전달되는 모습인 파동을 관객들에게 체험할 수 있게 해 줌과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의 무게감의 변화를 설명한다. 
결국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혼돈스러우면서도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양하고 화려한 장치들을 통해 자본의 무게와 에너지의 흐름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정보들의 홍수에 의해 혼란스러운 와중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인간들과 이것에 의해 복잡해져 가는 시장과 자본의 모습을 표현한다. 

20190630 밀라노에서

Solo Exhibition, Artist’s Notes, Lee Byungchan 


The Incinerator

A Standard Model, 

By being disintegrated, every element in nature maintains the rotating ecosystem. 
Similarly, every mass created by the energy of capital collapses and keeps circulating. 
An incinerator where all products eventually end up stands for a site of the capitalistic energy’s circulation. 
The capitalistic energy is dissembled at the incinerator located in a city, and the place’s atmospheric pressure is distinct from the city centre’s. Breathing with the uncanny energy, this place where all capitalistic goods are jumbled exposes an enormous aggregate of mass. 

By borrowing a standard model’s composition principles which explain structures of all figures, I embody mass and shapes of capital. Being seen as a medium’s dancing movement, the installation whose structure is a form of molecules inhales and exhales through non-visual and non-material energy of capital. 

The net attached to the lump describes the world distorted by mass. Moving depending on the lump’s respiration, the net steadily shakes the space. 
The grotesque feature of the breathing mass is staged with multi-coloured lighting effects. 
Reminiscent of a shrine of a shaman who prays for the fertility, the glamorous light connected to the main lump which enhances the commercial value of goods embellishes the entire space. 
The light effect designed for generating the redshift phenomenon signifies the unstable energy flows of mass. 
Thus, the capitalistic products which arrive at the incinerator reveal plastic mass possessing a molecular structure. In addition to that, the net and flashy effects of the light portray a precarious state of the mass. 

The stage arrangement also underlines the mass of capital. 
The installation on the floor has the shape of molecular forms. 
Around the structure, reflecting film paper, swings and brass instruments attuning to the sound of a metronome are prepared. 
The performance of swinging which signifies changes of mass is juxtaposed with the lightings evoking the redshift phenomenon and gentle waves of shallow water. The metronome sound and brass performance represent the fluctuation of time continuing in an unstable state of mass. 




Missing, Statement on the Stage 

The stage of <Missing> replaces the time and space a cheap sock had occupied with the unsteady condition of capital. 
The stage is the construction of a molecular structure. 
The irregular force of wind blows the curtain. 
The inconstant movements of the swings installed between the flapping curtains present the unsettled state of the space. Also, the movements create waves on a shallow puddle underneath the swings, and this shows that mass varies with its positions. The red and blue lights installed surrounding the swings indicate the redshift phenomenon; the sheets of reflection films reinforce the distortion of the lights.
The irregular rhythms of intersecting sounds from a metronome increase inconstancy of time. 
The sound of brass instruments playing to volatile beats triggers diverse waves in the air. 
The performance is a device playing the role of conveying the unstable currents caused by the swings and the metronome. 
The structure of the molecular form and the swings manifest the physical quantity of capital and products. Also, the brass playing mingled with the metronome sound illustrates the time flow which alters itself depending on the mass of capital. The stage transforms the unpredictable streams of capital into mutating waves.


자연상태의 모든 대상은 해체되어 회전하는 생태계를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에너지로 만들어진 모든 질량도 붕괴하며 순환된다.

모든 상품의 결과물이 모이는 소각장은 자본이 만들어낸 에너지의 순환구조 현장이다.

도시 가운데에 있는 소각장은 자본의 에너지가 해체하는 공간으로 도심과 다른 대기압이 존재한다. 모든 자본의 상품이 뒤섞인 공간은 기괴한 에너지로 호흡하며 거대한 질량을 보여준다.


모든 형태의 구조를 설명하는 표준모형의 구성원리를 차용하여, 자본의 질량과 형태를 시각화한다. 만신의 춤사위처럼 보이면서도 분자형태의 구조로 구성된 덩어리는 비 시각적이며, 비 물질적인 자본의 에너지로 팽창하고 호흡한다.

덩어리에 매달린 그물망은 공간이 텅빈 무대가 아닌, 질량에 의해 왜곡된 세계를 설명한다. 공간의 왜곡으로 사용된 그물망은 덩어리의 호흡에 따라 움직이며, 공간을 흔든다.

호흡하는 덩어리의 기괴한 형태는 다양한 색상의 조명과 함께 연출된다.

사물에 상품성을 부여하는 장치이자, 만신이 대지의 풍요를 기원하는 성황당의 장치처럼 보이는 화려한 빛들은 덩어리에 연결되어 공간을 장식한다.

또한 적색편이의 현상처럼 설치된 빛들은 불안정한 질량의 에너지를 설명한다.

소각장에서의 자본의 질량은 호흡하는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분자구조의 덩어리와 그물망 그리고 화려한 빛으로 질량의 불안정한 구조를 보여준다.


자본의 질량은 무대 연출로도 준비된다.

바닥에 연출되는 무대는 분자형태의 구조물로 설치된다.

구조물 주변으로는 반사필름지와 그네의 연출 그리고 교차되는 메트로놈 사운드에 맞춰 불안정한 연주를 하는 금관악기 등으로 준비된다.

질량의 변화를 설명하는 그네 퍼포머스 주변에는 조명장치로 적색편이 현상의 모습과 얇은 물에서 만들어진 파장이 넘실대도록 준비된다. 또한 교차되는 메트로놈 사운드와 금관악기의 연주는 질량에 불안정한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설명한다.




사라진 양말. 무대 작업 설명.

질량을 설명하는 무대 작업은 삼천원짜리 싸구려 양말이 그 가격만큼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고 사라진 모습을 자본의 불안정한 상태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무대작업이다.

무대는 분자구조로 짜여진 구조물로 준비된다.

구조물에는 불규칙하게 흘러가는 바람의 힘으로 휘날리는 커튼이 장식된다.

휘날리는 커튼의 구조 사이에 있는 설치된 그네는 불규칙한 리듬감으로 불안정한 공간의 상태를 설명한다. 그네 밑에 설치된 얇은 물웅덩이는 그네의 움직임으로 파장이 생기고,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질량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그네 주변으로 설치된 붉은 조명과 파란 조명은 적색편이를 설명하며, 주변 바닥에 펼쳐진 반사필름지로 빛의 왜곡을 심화시킨다.

메트로놈 사운드는 교차되며 불규칙적인 박자로 시간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불안정한 박자에 맞춰 연주되는 금관악기는 대기에 다양한 파장을 만들어낸다.

금관악기의 연주는 그네와 메트로놈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상태의 흐름을 설명하는 파장으로서 공간을 울리며 연출된다.

자본과 상품의 질량에 대한 설명으로 준비되는 분자형태의 구조물과 그네, 그리고 메트로놈 사운드를 이용한 금관악기의 연주는 자본의 질량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의 흐름을 설명한다. 예측되지 않는 자본의 흐름을 변형되는 파장으로 무대는 구성된다.

2019, White elephant,(P21), SEOUL​

Last April, I met Byungchan Lee for the first time. What I encountered were a smiley man with sharp eyes and two bundles of vinyl. I got a chance to watch a metamorphosis of the vinyl lumps there. Being swung from the ceiling, these two chunks attained their life by absorbing electronic energy. Emitting power more than they needed for maintaining survival, they consequently stimulated and deluded visual cells of observers. They were attempting to dominate and terrify the people with their enormity and quiet breathing sound. That was how Lee recreated our ecosystem of consumption. 
Lee’s gigantic and flashy creatures consist of plastic bags that we can easily find at markets. These black plastic bags are a staple material of contemporary societies, whereas they are treated as a trivial product worth only twenty wons. To disguise their insignificance, these huge creatures begin to adorn themselves. Why do they decorate and distort themselves by obsessively attaching plenty of ornaments? 
Their extravagance could be explained by Michael Spence’s term, ‘signal’. Proposing a job-market as an example, the economist, Michael Spencer investigated how a consumer makes a choice. Without access to information about applicants’ qualifications, employers select whom to be employed depending on signals such as educational background, appearances and certificates. In this circumstance, applicants are encouraged to purchase fine clothes and get a tutor for a better score on TOEIC. They get dressed up and overstate their information in order to deceive the decision-makers, like Lee’s plastic assemblage. Plastic’s lexical origin is a Greek word, Plastikos, referring to “capable of being shaped or molded”. It indicates infinite possibilities of Plastic. As though amino acid polymers play a role of a fundamental unit for formation of numerous organisms, this flexibility leads a potential for evolution through constant modification. The spectacular light, the glitter of the skin and the fascinating hair; they continuously shift and equip themselves with the glamorous effects to transmit a seductive signal. This activity ultimately allows the cheap plastic bags often neglected in common situations to gain omnipotent influence which controls people and impacts on the world. Therefore, slowly moving their body inflated by invisible existence of capital, Lee’s creatures are steadily becoming an object of fear, hatred and envy.   
Denying a dominant importance of rationality acclaimed by classical economists, Lee’s massive ecosystem of consumers highlights the significance of human emotion in addition to existing dynamics of consumption. Consumers pay for luxurious exteriors and become addicted to them. This phenomenon stems from the human dopamine system. In 1954, James Olds, an American psychologist, discovered that rats preferred a pleasurable electrical stimulus applied to their central nervous system site to satisfying their appetite or sexual desire. According to his essay released in 1954, he described that some of the rats starved to death as they were indulged in only receiving a brief pulse of electrical stimulation. Also, a neuroscientist, Eric Kandel drew a discovery by Wolfram Schultz to explain that dopaminergic neurons respond to not only food, sex or drugs which give an actual reward, but also even stimuli merely offering the reward. In this context, superficial flamboyance is a new impetus providing an intense thrill for consumers, even though it does not guarantee an actual reward. Accordingly, people are getting addicted to it as though drugs including cocaine and amphetamine cause an addiction by provoking central dopamine system and creating an illusion in a human brain. Thus, the consumers in the given ecosystem grow into a presence who chases the glow, being dependent on the glamour. 
As Lee’s huge creatures portray producers and consumers of the capitalistic environment, his 3D print pieces also convey features of alterations in emerging ecosystem of consumption. Along with fake plastic flowers, his 3D works reveal coexistence of production and consumption in which consumers produce and distort capital or information through advanced technology and media, and furthermore they sometimes consume the act of production itself. Hence, it shows that the series of his outcomes develop into another form of new creatures whose considerable force can manipulate the world.
In conclusion, Byungchan Lee presents ecosystem of capitalism that he has closely observed through this exhibition. Lee suggests a new shape of supply/demand functions equivalent to behavioral economics’ by discussing creatures who constantly make variations through their material properties, achieve evolution, distort information and decorate themselves. In addition, he unveils his own ambivalent position as a member of the ecosystem who is addicted to spectacles, and as an artist who attempts to attract spectators’ attention for survival by bringing variety and attaching glamourous lightings and decorations to his practice. ​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4월, 내가 처음 마주한 것은 항상 날카로운 눈에 싱글벙글 웃는 한 사람과 두 뭉치의 비닐 덩어리였다. 그 곳에서 난 그 비닐뭉치의 변태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리게 된 그 두 비닐덩어리는, 전기에너지를 흡수하면서 이윽고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며 빛으로 사람들의 시각세포를 자극하고,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하지만, 그 거대함과 조용한 숨소리로, 그들은 또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고, 두려움을 심으려 했다. 그는 그렇게 비닐을 통해 우리들의 소비생태계를 재현해 냈다. 
거대하고 화려한 그의 피조물은 비닐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봉다리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중요한 물질인 비닐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십원짜리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하찮음을 숨기기 위해, 거대한 피조물은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시작한다. 왜 그들은 다양한 도구를 덕지덕지 붙여가면서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고 왜곡할까. 그들의 화려함은 결국 마이클 스펜스가 이야기하는 신호(signal)가 아닐까. 경제학자 스펜스는 정보가 비대칭성을 가진 상황에서 소비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선택을 할 것인지를 구직시장을 통해 설명한다. 구직자들의 능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인사 관리자들은 구직자들이 가지고 있는 학력이나 인상, 자격증 등의 신호를 통해 어떤 사람이 더 능력이 있는지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구직자들은 좋은 옷을 사고 토익 학원을 다닌다.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고 정보를 왜곡한다. 마치 작가의 커다란 비닐덩어리처럼 말이다. 플라스틱은 쉽게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플라스티코스(plastik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는 플라스틱의 무한한 가능성을 설명한다. 마치 아미노산 중합체가 수많은 생명체를 창조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이 끊임없는 변이를 통해 진화를 할 가능성을 가져온다. 그 화려한 빛, 반짝거리는 피부, 그리고 아름다운 수염. 그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을 화려함으로 무장하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유혹의 신호를 보낸다. 그를 통해 저렴하고 천대받기까지 했던 그 비닐뭉치는 사람들의 생각을 조종하고 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본이라는 이름의 공기로 부풀린 거대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두려움의, 증오의, 하지만 선망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 거대한 소비생태계의 존재는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합리성을 부정하며 기존의 소비함수에 인간의 감정을 추가시킨다. 소비자들은, 화려함을 소비하며, 화려함에 중독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는 인간의 도파민 체계에 기인한다. 1954년 쥐를 통한 실험에서 제임스 올즈는 쥐들이 먹이와 섹스보다 시상하부에 주어지는 자극을 선호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1955년 논문에서 그는 쥐들이 자극에 몰두하다가 굶어 죽곤 했다고 썼다. 또한 에릭 칸델은 울프램 슐츠의 발견을 통해 도파민 신경세포가 음식, 섹스, 마약 등과 같은 실제 보상을 경험할 때뿐만 아니라 그 보상을 예고하는 자극에도 활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화려함은 소비자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며 이는 그들에게 강렬한 쾌감을 가져온다. 설령 그것이 실제 보상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결국 코카인과 암페타민과 같은 약물이 도파민 체계를 자극해 뇌가 착각을 하게 함으로써 중독을 일으키듯이 사람들은 이 화려함에 중독되어 간다. 그렇게 생태계 속 소비자는 그저 불빛을 바라보고 화려함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의 커다란 피조물이 소비생태계에서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듯 그의 3D 프린트 작업 역시 새로운 소비생태계 변화의 모습을 설명한다. 화려한 플라스틱 가짜 꽃들과 함께 할 그의 3D 프린트 작업물은 생산과 소비가 혼재하고 있고, 새로운 기술과 매개체들을 통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재화 혹은 정보를 생산하고 왜곡하며, 때로는 생산이라는 행위 자체를 소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일련의 결과물들이 또다른 형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계를 조작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가진 그 무언가가 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결국 그는 이 전시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보았던 소비생태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물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변이를 만들고 진화하며 정보를 왜곡하고 자신을 치장하는 피조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행동경제학의 그것과도 같은, 새로운 형태의 수요/공급함수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소비생태계의 일원이 되어 그 화려함에 중독됨과 동시에 본인 작품의, 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작품을 변화시키고 화려한 조명들과 재료로 치장하며, 관객의 눈을 현혹시키는 그의 양면적인 모습 또한 보여준다. 



The Plastic Bag Monster and Grotesque Realism

KHO Chung Hwan

At first, I thought that black plastics bags were scattered or piled up. Bits of aluminum foil, colorful shiny sheets of film as well as transparent ones, looked mixed in part. What is this? Then the plastic bags that laid flat as if they were asleep slowly began to rise as they were being blown about. Air was being injected from somewhere else. The essential air for life? Breath? Nutrients? If this were so, would it make this a living creature? The plastic bags that rose up were far taller than the height of human beings and even exceeded the height of most buildings. It seemed overbearing to look up at the plastic bags that once were gazed down upon. This seemed strange, unfamiliar and grotesque. The work looked like an octopus with suckers on arms, it looked like an unknown deep-sea creature, and it looked like an alien. It looked like an unknown creature that could not be identified as XX but looked like XX. Mutation? Metamorphosis? Transformer? Or the Other? And it looked like a monster. Because it is unknown. And because it is overbearing.
BONG Joon Ho created the movie, The Host. It is a story about a genetically modified monster that appears in the Han River, one that grew up eating toxic chemicals that flowed out of a US army base, who attacks people. Sure enough, there is no monster in the Han River, but there is a US military base. Because of this, the film criticizes the US army presence. Likewise, did LEE Byung Chan create another version of this monster? Is he suggesting another occasion to criticize reality? Perhaps. Just as expected the artist calls this work, Ecosystem. Ecosystem? At firs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ster and an ecosystem was not clear. However, if this i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lastic bags and an ecosystem, then it becomes a different story. Plastic bags belong to the lowest part of a consumption ecosystem. In an era of image politics where images consume everything, and images replace reality, plastic bags are not even considered an image (if it had to be categorized, it is an image that represents the lowest part of an consumer ecosystem). Bags are born with the fate of being discarded after a single use, and are made to be provisional items. The artist created a monster with such plastic bags.
As it turned out, the artist compared the monster to capitalism (which is shaped into a monster), and created a capitalist monster. As known, what’s equivalent to a monster in capitalism, are forms of ‘Mool-shin(fetishism).’ After the death of God was publicly declared, what replaced the empty space of God was capitalism and ‘Mool-shin.’ ‘Mool-shin’ (and Mool-shin-ju-ui) is a translated word for fetishism. The word 'fetish' suggests an attitude of transforming an object into a character, as the object is being considered a fetish. It refers to an attitude of reifying things—not only objects but also other things that cannot be reduced by objectification such as psychological, spiritual, sexual, economic, and aesthetic matters. The phenomenon of fetishism does not discriminate the shaped nor amorphous. It is all-encompassing and indiscriminate.
The plastic bags, and the plastic monster before fetishism is as thoroughly helpless as a monster. As is widely known plastic bags are vulnerable to external impacts from the environment. Even a small scratch can cause them to sag and to lose air. Hence the plastic bag monster, which is seemingly overbearing and yet even slightly cute with no air is a transformed object (by reifying capitalism’s desire into an object) that tempts a form of commodity fetishism, and on the other hand it satirizes desire’s fictitious nature. In other words it can be an example of Gilles DELEUZE’s notion of becoming XX or pretending to be XX.
For DELEUZE, becoming XX or pretending to be XX is a strategy to imitate institutions and power (in fact, pretending to imitate) while imploding them. The artist's plastic bag seems to have manifested a form of commodity fetishism as a subject of worship. Armed with dignity and authority that cannot be challenged, and with indiscriminate violence and irrational punishment that makes people shiver, and sometimes embellishing and mystifying oneself as an unknown object, the plastic bag monster seems to have been realized as a fetish. However, unlike its appearance in fact it’s not more than a piece of trash made with plastic bags. Moreover, the plastic bags without air seem like they have declared the death of fetishism. The artist’s plastic bag monster is read as an allegory about the fictitious nature of fetish and its death.
There are more serious aspects to this than its appearance. Previously, I stated that plastic bags belong to the lowest part in a consumerist ecosystem, and are situated on the bottom of an image politics. The lowest part? And the bottom? Who appoints plastic bags to the lowest, and the end of the ecosystem pyramid. Capitalism is driven by principles of economic priority and the maximization of efficiency. In this process, things that are not economical, things that are inefficient are put on the edge, and Georges BATAILLE once called the ones that are excluded to the edge of capitalism, transgressions (taboo) and excess. They are forbidden by capitalism and are the excesses produced by capitalism. Excess is inherently anti-capitalist because it is forbidden by capitalism. The excesses that are formed through internalized repressed (despised) desires are dangerous from a capitalist perspective, as they vigilantly look out for a chance for the capitalist system’s overthrow (if it was Jacques LACAN, he would have said the real order that would look for the overthrowing of the symbolic order, the real order that would appear from the gap of the symbolic order).
Capitalism, as its excessive existence specifically points to death and art. Death is economically a zero-cost state, and art is also an ineffectual one (coincidentally, the artist's plastic bag monster reminds us of death, and is utilized art as a tool). The formal logic that realizes oneself as the art in the form of excess is amorphous. As known, formalism meets the aesthetic requirements of capitalist commodity planning. However, it’s not the case of the amorphous. Amorphousness that does not have any fixed shape is unexpected. Gilles DELEUZE would have called it schizophrenic analysis that uses unpredictability as a strategy and identity, a Rhizome, or a breakout, de-territorialization that crosses all decisive points. The monster is just like that. There is no fixed shape for monsters. The monster itself is amorphous.
Previously, I mentioned that the artist’s work seemed to be an unknown creature that could be identified as XX, but looks like XX. Monsters are, in other words, the existence of unknown, arbitrary, everchanging, indeterminate, and variable. Monsters are amorphous excess, which is something that capitalism wants to avoid, something that embodies unspeakable circumstances of capitalism, something pointed to by capitalism, and something capitalism does not even acknowledge (capitalism’s blind spot? its implosion? the center of capitalism?). The plastic bag monster that pretends to be overbearing, and sometimes pretends to be cute, is the amorphous excess that witnesses and reveals the fictitiousness and death of this commodity fetishism. It is the internalized rebellion and violation by what’s appointed as the lowest part of an ecosystem. It is anxiety, instability, indeterminancy and uncertainty that violates the stability (which is just seemingly so) of the capitalist ecosystem. It is a symptom and a pathological phenomenon that modern people who live in the capitalist consumption ecosystem as a reality, have internalized.
The plastic bag monster that is colorful and glittering, inflates and deflates, pretends to be alive, and moving, is anxious (or causes anxiety). Or perhaps it praises the primal lifeforce? For instance, the Dionysian indulgence and self-realization of reckless desires, carnival (Mikhail 
BAKHTIN saw carnival as a place where people's healthy life forces emerged as a result of a legal violation), and thus it can be viewed as the realization of Jouissance (Eros that is combined with death, Eros as sweet as death). It’s magical. Shamanic. The artist’s plastic bag monster reminds us of a piece of fabric that is hung on a sacred tree (Shin-mok) waving in the wind. To reference Mikhail BAKHTIN again, the artist's plastic bag monster is the manifestation of Grotesque realism, a practice and form of representation that perhaps symbolizes the unconsciousness of human beings, an a form of unidentified wholeness (in fact, the wholeness of life force) of anxiety, instability, indeterminancy and uncertainty. 


비닐봉지괴물과 그로테스크리얼리즘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처음엔 그저 검은 비닐봉지들이 흩어져 있거나 쌓여있다고 생각했다. 더러 은박지와 알록달록한 반짝이 필름 그리고 투명 필름도 부분적으로 섞여 보였다. 이게 뭐지? 그리고 잠자듯 누워있던 비닐봉지들이 빵빵하게 부풀리면서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주입되고 있었다. 생명에 필수적인 공기? 호흡? 자양분? 그렇다면 살아있는 유사생명체? 그렇게 일어선 비닐봉지는 사람 키보다 웃자라고 웬만한 건물 높이를 훌쩍 넘어선다. 그렇게 내려다보이던 비닐봉지를 올려다보니 위압적으로 보였다. 생경하고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다리에 빨판이 달린 문어처럼도 보였고, 알 수 없는 심해 생명체처럼도 보였고, 외계생명체처럼도 보였다. 다만 00처럼 보일 뿐 00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미지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돌연변이? 변태? 변종? 타자? 그리고 괴물처럼 보였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위압적이라는 점에서.

봉준호는 영화 <괴물>을 만들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유독성 화학물질을 먹고 자란 유전자 변형 괴물이 한강에 출몰해 사람들을 공격하는 영화다. 한강에 괴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미군부대는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미군부대를 비판한 영화다. 이처럼 이병찬의 작업 역시 괴물의 또 다른 버전을 만든 것일까? 현실비판을 위한 또 다른 계기를 제안한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작업을 <소비생태계>라고 부른다. 소비생태계? 처음엔 괴물과 소비생태계와의 관계가 선뜻 와 닿지가 않았다. 그러나 비닐봉지와 소비생태계와의 관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비닐봉지는 소비생태계의 최하층에 속한다.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이미지정치학의 시대에 비닐봉지는 이미지랄 것도 없는(굳이 따지자면 최하층 부류를 이미지화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의 운명을 타고났고 임시방편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런 비닐봉지로 작가는 괴물을 만들었다.

그랬다. 알고 보니 작가는 자본주의를 괴물에 비유한 것이었고, 자본주의를 괴물로 형상화한 것이었고, 자본주의 괴물을 만든 것이었다. 알다시피 자본주의에서 괴물에 비유할 만한 경우로 치자면 물신이 있다. 신의 죽음이 공공연하게 선언된 이후 그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 자본주의고 물신이다. 물신(그리고 물신주의)은 페티시즘을 번역한 말이다. 페티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사물대상을 주물로 보고 인격대상으로 탈바꿈시키는 태도를 말한다. 기왕에 사물대상의 존재방식을 가진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사물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성적인 것들,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들, 그리고 미학적인 것들을 사물화 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게 물신의 물화현상은 유형무형을 가리지 않는다.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이다.

그런 물신 앞에 비닐봉지는, 비닐봉지 괴물은 괴물이 무색할 만큼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알다시피 비닐봉지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취약하고 약간의 스크래치에도 바람이 빠진 채 주저앉고 만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위압적으로 보이고 살짝 귀엽게 보이기조차 하는, 바람이 빠진 채 볼품없이 주저앉은 비닐봉지 괴물은 한편으론 자본주의 물신을 유혹하는 오브제로(자본주의의 욕망을 물화된 형식으로) 전이시킨 것이고 다르게는 그 욕망의 허구성을 풍자한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질 들뢰즈의 00되기 혹은 00인 척하기를 예시한 것일 수 있다. 들뢰즈에게 00되기 혹은 00인 척하기는 제도와 권력을 모방하면서(사실은 모방하는 척하면서) 제도와 권력을 내파하는 전략이다. 그렇게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자본주의 물신이 주물숭배대상으로 현현한 것 같다. 위엄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권위로 무장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무관용적인 처벌로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드는, 때론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비화하는 물신이 현현한 것 같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렇지 알고 보면 한갓 비닐봉지로 만든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심지어 바람이 빠진 채 누워있는 비닐봉지는 물신의 공공연한 죽음을 선언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물신의 허구성과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겉보기에 그렇고, 여기에는 더 심각한 이면이 있다. 앞서 비닐봉지는 소비생태계의 최하층에 속하고 이미지정치학의 최 말단에 위치한다고 했다. 최하층? 최 말단? 누가 비닐봉지를 최하층으로, 그리고 최 말단으로 지목하는가.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견인된다. 그 과정에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변방으로 내몰리는데,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자본주의의 가장자리로 추방된 것들을 금기(터부)라고 부르고 잉여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에 의해 금지된 것들이고 자본주의가 낳은 잉여다. 잉여는 자본주의에 의해 금지된 탓에 태생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억압된(거세된) 욕망을 내재화한 잉여는 호시탐탐 자본주의의 전복을 노리는,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천만한 존재다(자크 라캉이라면 호시탐탐 상징계의 전복을 노리는 실재계,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하는 실재계라고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잉여존재로서 특히 죽음을 지목하고 예술을 지목한다. 죽음은 경제성 제로인 상태고, 예술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공교롭게도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죽음을 상기시키고, 예술을 도구화한 것이다). 그렇게 잉여로서의 예술이 자기를 실현하는 형식논리가 무정형이다. 알다시피 정형은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획이 요구하는 미학적 조건을 충족시킨다. 무정형은 그렇지가 않다.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는 무정형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질 들뢰즈라면 종잡을 수 없음을 전략으로 취한, 아예 종잡을 수 없음을 정체성으로 하는 정신분열증적 분석 혹은 리좀 혹은 모든 결정적인 지점을 가로지르는 탈주 혹은 탈영토화라고 했을 것이다). 괴물이 꼭 그렇다. 괴물엔 정해진 형식이 없다. 괴물 자체가 무정형이다.

앞서 작가의 작업은 다만 00처럼 보일 뿐 00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미지의 생명체처럼 보인다고 했다. 괴물은 말하자면 미지의 존재, 임의적인 존재, 이행하는 존재,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다. 괴물은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은폐하고 싶은, 자본주의의 말 못할 속사정을 내재화한, 자본주의에 의해 지목된, 때론 자본주의 자신도 모르는(자본주의의 사각지대? 내파? 자본주의의 중심?) 무정형의 잉여다. 위압적인 척하는, 때론 살짝 귀여운 척하는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물신의 허구성과 죽음을 증언하고 폭로하는 무정형의 잉여다. 소비생태계의 최 말단으로 지목된 것들이 내재화한 반란이고 위반이다. 자본주의 생태계의 안정체제(다만 겉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인)를 위반하는 불안이고 불안정성이며 불확정성이고 불확실성이다. 자본주의 소비생태계를 현실로서 살아가는 현대인에 내재화된, 현대인이 앓는 징후고 증상이며 병리적 현상이다.

울긋불긋하고 번쩍번쩍하는, 부풀어 오르면서 허물거리는, 살아있는 척하는, 움직이는 척하는 비닐봉지 괴물은 이처럼 불안하다(아니면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혹은 원초적인 생명력을 예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디오니소스적인 방종과 무분별한 욕망의 자기실현, 카니발(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합법적 위반을 계기로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장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이상스(죽음과 결합한 에로스, 죽음처럼 달콤한 에로스)를 실현한 것일 수 있겠다. 그리고 주술적이다. 무속적이다.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보기에 따라서 당나무(신목)에 걸려있는, 바람에 치렁치렁한 조각 천을 연상시킨다. 다시, 미하일 바흐친을 인용하자면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어쩌면 인간 내면의 무의식을 형상화한, 불안과 불안정성과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알 수 없는 총체(사실은 생명력의 총체)를 형상화한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의 발현이고 실천이며 표상형식일 수 있다.


2017, 'The Camouflaged Dried Pollack',  (SongEun ArtCube), SEOUL



Some years ago, Byungchan Lee was a financially struggling university student in Songdo, a city going under immense urban development since 2003, which sparked his interest in a “consumerist ecosystem” that sprouted from the distance and isolation he experienced being in the midst of a large city development setting. Lee expresses his perspective on this bizarre phenomenon and scene filled with flashy ads and fabric banners as an installation of an enormous organism made out of plastic bags. Plastic bags, his main material of choice, are one of the most unprejudiced thing that can be easily obtained by anyone regardless of economic standing or social status when a purchase is made, but just as easily discarded once they lose their function, at which point they are demoted as things of insignificance in the ecosystem of consumption. The artist takes such a product of negligible value and gives it life, by connecting several of them together and filling them with air, to shape them into a god-like form that represents the source as well as the ruling power of a consumerist society. The almost monster like gigantic structure is Lee’s way of creating an environment for viewers to feel the isolation and fear one can experience in a consumerist ecosystem.


In his last solo exhibition The Illusion in the Mirror (Corner Art Space, 2015) Lee presents a “city organism” created by covering the transparent walls of a store window exhibit space in Seoul – the center of consumerism – with adhesive film, so that it shines brightly with the sun’s reflecting rays. The bizarre matter brilliantly shining in the middle of a city packed tight with buildings appeared to passersby like a hallucinatory mystical entity. Lee follows this up with SPACE DISTORTION (Gallery Royal, 2015) that was inspired by the residents of Magok-dong – a town near his workshop – who are living with desperate hope since their neighborhood was designated as one of the city redevelopment areas. Using reflective adhesive film sheets, Lee portrays the distorted reality and desires of these people that are warped by a black hole-like powerful invisible force. In Calling for Mammon (Space M, 2016) Lee tries something new by introducing a religious element to his work, adding LED lights and the vibrant ringing sound of a shaman’s bell to his usual plastic bag made organism, as if to resemble a scene from a shamanic ritual.


This exhibition is the artist's take on a society ridden with the desire to consume and the act of consuming as a supernaturally powerful ruler. Envisioned when seeing a fashionably lit up Pollack fish at a lighting store, The Camouflaged Dried Pollack (2017) is based on the Korean folk religious tradition of hanging a dried pollack above a door or serving it as part of the ancestral rites offering table, as a way of wishing for all things to be well. The dried fish that is usually tied and hung with a twisted string, is blasted with showy lights that add product appeal and conjure a surreal and mystical feel about it, which is then captured in a series of photographs. The full room installation is titled The Expanded Heavy Ecosystem (2017), a Pollack-shaped enormous plastic bag organism of an undulating state, being repeatedly inflated and deflated using a motor air pump to create a sense of intimidation for the visitors. Decorated all around the “organism” are colorful lights and artificial flowers, reminding onlookers of a sunghwangdang - a local shrine with hanging colorful strings dedicated to the god protecting the town. Each time the kinetic object moves, water is expelled to the ground and the collected water creates a sense of spatial distortion that perhaps is a way of illustrating to viewers the human society that is ever changing with a dynamic city, to the point of not being able to recognize its true form. In The Dense Sheet (2017) Lee mimics stained-glass windows commonly found in churches but instead once again uses plastic bags. While lacking vibrancy in color, the artist still manages to recreate with the plastic counterpart the holy ambiance that is characteristic of the original glass version. Aided with the incoming natural sunlight, the surrounding plants and ringing sound of a bell, viewers are given a somewhat spiritual experience. The effort he puts in his work in making plastic bags do what glass usually does also reveals the artist’s keen interest regarding the mass of objects. As such, Byungchan Lee has continuously devoted interest to a "consumerist ecosystem," honing in on the similarities he observed between a consumption driven society - where everyone aspires for and blindly supports the common goal of consuming - with the ritualistic acts of exalting and believing in a religion, and uses rituals and rites as a way of alluding to us the consumerist society as he sees it.


Haeni Park / Laurence Geoffrey’s, Ltd.


A reddish dried Pollack hangs randomly amidst glittering lights at a lighting store I frequent. Flooded in yellow, then blue, and back to red light, the fish manages to camouflage not only it dusty surface but it smell and ugliness. The store's lights that enhance and sell the glitziness of products as seen from outside the store window, has managed to turn the Pollack into a preserved fake plastic-like product.


- From the Artist’s Statement



㈜로렌스 제프리스



위장된 북어


이병찬은 2003년부터 대규모의 도시개발이 진행중인 송도국제도시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으며, 경제적 상황이 어려웠던 당시 대도시 개발 현장에서 느끼는 괴리감, 소외감으로부터 ‘소비 생태계’에 주목하게 되었다. 현란한 아파트 분양·투자 현수막과 광고 등으로 가득한 도시개발 지역에서 작가는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도시의 기이한 현상과 풍경을 ‘비닐’을 활용해 거대한 유기체로 표현해낸다. 작업의 주된 소재인 비닐은 경제적 여건,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물건을 구매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가장 평등한 사물이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만큼 용도를 잃었을 때 버려지고 소비생태계 안에서 하찮은 사물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같이 상품으로써 가치가 없는 비닐을 여러 장 이어 붙여 공기를 채우고 빛과 소리를 가해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소비 사회의 근원이자 이를 다스리는 위력을 지닌 신과 같은 형상으로 묘사한다. 언뜻 괴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거대 유기체는 관객으로 하여금 소비 생태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외감,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지난 개인전 “거울 너머 환각”(2015)에서 작가는 자본주의의 중심지인 서울 도심의 쇼윈도 전시공간 사방에 필름지를 설치해 비닐에 반사된 빛에 의해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생명체’를 선보였다. 높은 빌딩으로 가득한 도심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기괴한 생명체는 거리를 지나는 이들에게 환각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로서 보여졌다. 이어 “공간왜곡”(2015)에서는 작업실과 근접한 마곡동이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블랙홀과 같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왜곡된 현실과 욕망을 필름지에 의해 반사된 생명체로 드러냈다. 또한, “Calling for Mammon 소비생태계 – 신을 부르다”(2016)에서는 지속적으로 선보여 온 비닐 생명체 외관에 LED 조명의 현란한 빛과 무당의 방울소리를 더해 무속신앙 의식의 한 장면과 같이 묘사하는 등 작업에 종교적 요소를 담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소비 욕구에 얽매인 사회를 작가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작업을 선보이며, ‘소비’라는 행위를 신과 같이 초자연적 위력을 지닌 지배자의 모습으로서 드러낸다. 조명가게에서 불빛에 의해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북어를 보며 영감을 받은 <위장된 북어>(2017)는 민속신앙에서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의미로 북어를 문 위에 매달거나 제사상에 올리는 관습에서 착안한 것으로, 주로 실타래를 감아 올리는 북어를 상품성을 지닌 현란한 조명으로 비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진 연작이다. 북어 형상의 거대한 비닐 생명체인 <팽창된 무거운 질량>(2017)은 <위장된 북어>과 같은 맥락으로 기복적 이미지를 활용한 작업으로, 에어모터의 작동에 의해 반복적으로 수축, 팽창하며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작가는 비닐 생명체 주위를 형형색색의 조명과 조화로 장식해 마치 마을 수호신을 모시기 위해 오색 끈을 매달아 놓았던 성황당을 연상시킨다. 또한, 생명체의 움직임에 의해 비닐 안에 채워진 물이 전시장 바닥으로 떨어지며 고인 물은 공간을 왜곡시키며, 마치 번화한 도시에 따라 움직이며 실체를 가능할 수 없이 변조하는 인간사회를 비유하는 듯 하다. 교회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닐로 재현한 <깊은 낱장>(2017)은 실제와는 달리 화려한 색감은 없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연광과 주변의 식물, 방울소리에 의해 성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영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무거운 유리 대신 비닐을 사용했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소재와는 무관하게 스테인드글라스 고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업은 사물의 질량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듯 이병찬은 지속적으로 ‘소비 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모든 이들이 공통된 목표(소비)를 지향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신을 숭배하고 섬기기 위한 종교 의식과의 유사성을 찾았으며 이를 의례, 의식과 표상 등에 빗대어 본인이 바라 본 소비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주 가는 단골 조명가게에는 화려한 조명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붉은 북어가 벽에 매달려 있다.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그리고 다시 붉은 색으로 변하는 북어는 화려한 위장으로 먼지뿐만 아니라 냄새와 못생긴 얼굴까지 숨긴다. 쇼윈도 유리창 넘어 화려한 상품의 관성을 납품하는 조명가게의 빛은 북어를 가짜 플라스틱 박제로 상품으로 만들었다.”

- 작업 노트 중


Support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견고한 공기의 꿈, 또는 스러지지만 소멸하지 않는 괴물


장태순 서울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원 


Tae-Soon Chang,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Philosophy Researcher




이병찬의 <도시생명체(Urban Creature)> 연작은 무엇보다 관람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스펙터클이다. SF나 호러영화에 나올 듯한 화려한 색상의 낯선 생물이 숨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장면은 어린이들도 좋아하는 원초적인 즐거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병찬의 작품은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러 번 겹쳐 칠한 유화처럼 그의 작품에는 다양한 층위가 숨어 있다. 이 생명체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를 통해 그 층위를 살펴보자.

도시생명체를 이루는 요소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닐이다. 비닐은 소비생태계의 맨 밑바닥을 이루는 질료이다. 작가는 인천 송도에서 신도시의 탄생과 함께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비닐 쓰레기를 목격하며 괴물을 구상했다고 한다. 비닐은 그 자체로는 대개 상품이 아니지만 거의 언제나 상품에 부수되는 재료이며, 상품이 판매되는 즉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물질이기도 하다. 한밤중에 주로 일하는 도심의 환경미화원들처럼, 비닐은 소비사회의 기저에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모두가 언제나 사용하지만 관심을 갖지 않고, 늘 보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한다. 상품을 빛나게 하지만 그 자신은 전혀 빛나지 않는 비닐은 조연도 못 되는 엑스트라이며 소비생태계의 최약자이다.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정상성의 규범을 벗어난 약자나 억압받는 자들이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오듯이, 소비생태계의 약자이자 억압의 대상인 비닐은 이병찬의 작품에서 괴물의 형태로 우리 앞에 돌아온다. 물론 이 귀환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이들을 하나로 모아 라이터의 불꽃으로 피닉스처럼 되살린 작가이다. 바디우는 한 사회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가장 잘 보이게 되는 것이 사건의 한 징표라고 말한다. 소비의 사이클에서 보이지 않던 비닐이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상품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이 사회의 실상이다. 라캉을 빌어 말하자면 도시생명체는 소비사회라는 상징계를 슬며시 열어젖혀 그 이면에 있는 실재를 보여주는 구멍이다. 괴물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익숙하면서도 낯설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공기이다. 예술적 상상력 속에서 공기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자 운동이다. 희랍어 프네우마(pneuma)가 잘 보여주듯 고대인들에게 공기란 생명의 숨결이었다. 우리말의 바람 역시 단순히 기체 분자의 운동이 아니라 기의 흐름이며 신의 움직임이지 않은가? 비닐로 만든 괴물에 모터 팬으로 불어넣은 공기는 작가가 피조물에 부여한 인공생명이다. 공기는 또한 운동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상상력은 변신의 능력이며, 이러한 상상력의 변신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질료가 바로 공기이다. 공기는 자유롭게 한 가지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인공생명을 부여받은 이병찬의 도시생명체들도 공중을 날며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괴물들은 공기로 만든 조각이므로 가벼우며 유연한 운동성을 가진다. 비닐은 지금 여기서 공기를 잠시 가두기 위한 불가피한 틀일지도 모른다. 공기는 형태에 따라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며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마찬가지로 이병찬의 도시생명체들도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부여된 생명은 단 하나이다. 공기는 상승의 벡터이며, 가벼움이다. 공기는 날아오르는 것, 새다. 도시생명체들은 비닐 속에 담긴 공기, 고체화된 공기이다. 낯선 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공기는 팬으로 불어넣은 인공의 공기, 기계적 공기이며, 도시생명체는 비닐로 만든 사이보그이다. 그러나 이 생명체는 여전히 공기로서의 운동성과 유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 도시생명체는 날아오를 수 있고, 변신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처음 탄생했을 때 도시생명체는 어렸다. 2012년에 주차장에 나타났던 새하얀 도시생명체는 <에일리언 4>에서 인간과 에일리언의 잡종으로 태어난 흰색 에일리언처럼 알에서 갓 깨어난 유충을 닮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생명체의 몸은 점점 화려하고 정교해졌다. 성장을 마친 생명체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낯선 생물은 도시를 배회하며 쇼윈도 안에 들어가거나(<거울 너머 환각>) 폐공장을 점령했다(<자연사 박물관>). 미지의 생명체는 그 존재만큼이나 머무르는 자리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요즘 괴물은 나무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Calling for Mammon>), 식물원의 나무들 사이에 숨기도 한다(<2016 Nantes Scopitone Festival>). 공기로 만들어진, 바람을 닮은 괴물이 나무를 찾아가는 것은 왜일까? 나무는 대지이자 물이면서도 상승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공기의 닮은꼴이다. 공기가 급격한 상승, 추락 가능한 상승이라면 나무는 느린 상승, 추락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승이다. 대지에 단단히 발을 딛고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물이다. 나무 사이를 떠돌며 괴물은 소비사회의 특이성에서 정상성으로 변신하기를 원하는 듯 보인다. 도시생명체는 샹들리에로 장식된 결혼식장의 천장에 오르는가 하면 나무에서 비닐로 된 기와지붕을 굽어보기도 한다. 중세 대성당의 가고일처럼, 괴물은 높은 곳에서 소비사회를 굽어보며 조롱한다.

도시생명체를 이루는 세 번째 요소는 소리다. 괴물의 곁에 선 관람자는 모터 팬의 소리, 방울 소리를 듣는다. 팬의 소음은 괴물의 호흡이며 방울소리는 괴물의 울음이다. 바슐라르가 바람을 가르는 새들의 날개짓을 울음소리와 바꿔치듯이, 도시생명체의 낯선 형상은 그 가벼움으로 인해 무당의 방울 소리로 변신한다. 그 방울을 흔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공기이며 바람이다. 방울 소리로 울며 공기 속을 날아오르는 낯선 생명체는 우리를 다른 세계, 신의 세계로 이끈다.

괴물을 이루는 마지막 요소는 빛이다. 도시생명체는 단순히 비닐로 만들어진 튜브가 아니다. 원색의 LED 조명 속에서 빛날 때 도시생명체는 극장의 스크린이 된다. 바람과 공기의 형상인 낯선 생물은 그 자체로도 꿈 같은 것이지만, 빛을 받은 괴물의 주위에서는 영화와도 같은 꿈이 펼쳐진다. 빛 속에서 도시생명체는 때로는 환상이, 때로는 악몽이 된다. 컬러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빛과 소리의 스펙터클은 성황당에 매달린 기원의 오색 천이 되기도 하고, 소비사회의 광고판이 되기도 하며, 금융시장의 자본 흐름을 보여주는 펀드매니저의 멀티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영이며 꿈이므로 괴물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괴물은 소비사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소비사회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스펙터클의 사회는 모든 것을 스펙터클화하며, 도시생명체의 작가가 의도하는 소비사회 비판조차도 스펙터클을 위해서라면 감수한다. 스펙터클이 되면서 괴물은 점점 덜 불편해지고 있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놀라움이라는 단일한 감정으로 변하면서 구멍 뒤의 실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병찬의 최근작은 ‘지나치게 재미있다’는 함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시생명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알 속 태아에서 유충을 거쳐 성충의 모습이 된 벌레 모양 괴물들은 나무를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괴물의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 기계문명의 원동력인 전기를 공급받는 한 도시생명체는 살아있지 못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앞에 나타난 괴물의 숙명이기도 하다. 데리다의 해체론이 말하는 형이상학의 운명처럼, 점차 소멸해가지만 결코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모습으로 도시생명체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2015,'Space Distortion' (Gallery Royal), SEOUL




From the Outskirts of Consumer Society to the Center of Desire


A Monster, it evolves!

Noh Jin-Gu


It was around April that I met artist Lee Byung-chan again. At that time, he was holding a private exhibition entitled “The Illusion in the Mirror” in Corner Art Space. As he is now, Lee Byung-chan was then making a series of monstrous works on the theme of “Urban Creatures.” What interested me in the exhibition was not his works themselves but the particular sense of tension created by the spatial alignments between his works.


The monsters were inside the display window facing outward and there was a giant shopping mall across the four-lane road beyond the show window. On the upper floor of the building where the monsters were exhibited was a plastic surgery hospital, which is the very symbol of capitalism. It was the optimal ecology for the monsters that they say are born in the entropy of consumption. It was like the monsters, facing the show window, were confronting the giant shopping mall and the building the hospital is in was incubating the monsters. Boldly but calmly, Lee Byung-chan embraced the local features surrounding the exhibition space into his esthetic domain.


Come to think of it, Lee Byung-chan’s works have a tendency to stress how a monster would look with a certain background, rather than focus on the visual appearance of the monster. The previous keyword of his exhibition was "Illusion" and he set "distortion" as the exhibition theme of this royal gallery. The monsters themselves do not always take the center of the significance but are part of the periphery that they are anxiously related to. Things are not much different in this exhibition. Lee Byung-chan attempts to tell his story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sters and their surroundings. By the way, what do the monsters have to with "distortion"? In his artist statement, he told stories about experiences he had while he was living in Makok district. Residing in an old house, he overheard in a botanical garden he loves that the neighboring areas would be re-developed sooner or later. The expectation and hope of the residents in that area felt very strange to him. They were under the belief that the economic compensation from the redevelopment project could solve all of their life problems. He testified that he witnessed “a black hole that exists but does not exist” here. The black hole was the basic energy from which the monsters could be created and was the desire that distorts everything. Artist Lee Byung-chan compares the groundless optimism that the residents had about the redevelopment project to the monsters made with colorful vinyl and their images incompletely reflecting through the packing film.


The monsters were merely the grounds of consumption entropy in the previous exhibition, but they emerged at the center of consumptive desire. In this exhibition, another device has been added. It is the tiled roof that warps the monsters. This roof is a shell to protect the monsters and confine them at the same time. If we try to find a match in reality, the old houses in the area of the development project come to mind. This tiled roof itself looks inanimate, but becomes a thin outer wall laid between the space the monsters live in and a reality supporting the space of illusion in which the monsters dwell. The relation is like an egg and a chicken. An egg protects a chick, but the chick is destined to come out of it, eventually, breaking the egg to face reality. I don’t know how long the monsters made of only vinyl and air can survive in this reality.


Lee Byung-chan’s monsters are evolving in this consumer society. They become as ugly, fat, and weak, evolving with society. Frankly, I feel closeness to and sympathize with the monsters rather than feel a sense of difference when I see them. While watching his monstrous works, I came to think I was looking inside something in me. It’s something I am eager to turn away from but can’t forget.




소비 사회의 변두에서 욕망의 중심으로, 리뷰, 2015

괴물, 진화하다 , 글쟁이 노진구


이병찬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지난 4월경다. 당시 그는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 <거울 너머 환각>을 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병찬은 ‘도시생명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괴물 연작을 만들고 있었다. 전시를 보며 내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작품과 작품이 배치된 장소가 갖는 특수한 긴장관계였다.

괴물은 바깥으로 통유리창을 낸 쇼윈도 안에 있었고, 쇼윈도 너머로 4차선 도로 건너편에는 대형쇼핑몰 빌딩이 있었다. 괴물이 전시된 빌딩의 위층에는 자본주의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성형외과병원이 입주해있다. 소비의 엔트로피 속에서 탄생한다는 괴물에게는 최적의 생태계가 아닐 수 없다. 괴물은 쇼윈도를 마주하고 대형쇼핑몰과 대치하고 있었고, 성형외과가 들어선 빌딩이 괴물을 배양(incubating)하고 있는 셈이다. 이병찬은 대담하지만 조용한 방식으로 전시실을 둘러싼 장소적 특성을 자신의 미적 공간에 수용했다.

그러고 보면 이병찬의 작업은 육안에 보는 괴물의 모습보다 어떠한 배경 속에서 괴물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번 전시의 키워드는 ‘환각’이었고 이번 로얄 갤러리에서는 ‘왜곡’을 중심 주제로 잡았다. 도시생명체 연작에서 작품의 의미는 언제나 괴물 자신에 있지 않고, 괴물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주변부에서 획득된다. 이번 전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병찬은 괴물 자체의 모습보다는 괴물과 주변부의 관계에서 이야기를 전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괴물은 ‘왜곡’과 무슨 관계일까. 작가노트에서 그는 마곡지구에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오래된 주거공간에 살고 있던 그는 단골 식물원에서 조만간 이 주변지역이 재개발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갖는 재개발에 대한 희망은 작가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들은 재개발로 인한 경제적 보상이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블랙홀”을 봤다고 증언한다. 이 블랙홀은 괴물을 탄생하게 만드는 원초적 에너지, 모든 것을 왜곡하는 욕망 그 자체다. 이병찬 작가는 재개발지구에 대한 사람들의 근거 없는 낙관론을 색색의 비닐봉투로 만들어진 괴물과 포장필름에 의해 불완전하게 반사되는 괴물의 이미지로 비유한다.

전작에는 소비의 엔트로피의 찌꺼기에 불과했던 괴물은 이번 전시에는 소비 욕망의 중심에서 나타났다. 이번 전시에서는 또 하나의 장치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유령처럼 괴물을 감싼 기와지붕이다. 이 지붕은 괴물을 보호하는 껍질이면서 동시에 괴물을 가두고 있는 것으로, 현실적인 상대역을 찾자면 재개발의 대상이 되는 낡은 집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기와지붕은 그 자체로 생명을 잃은 모습이지만, 괴물이 사는 공간과 현실 세계 사이에 얇게 처진 외벽으로서 괴물이 살아가는 환상의 공간을 지탱한다. 이것은 알과 병아리의 관계와 같다. 알은 병아리를 보호하지만, 병아리는 끝내 껍질을 깨고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병아리와 달리 비닐봉지와 공기로 만들어진 괴물이 현실 속에서 얼마만큼 생존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이병찬의 괴물은 소비사회 속에서 점차 진화해가고 있었다. 그만큼 괴물은 보기 흉해졌고, 비대해진 동시에 연약해졌다. 솔직히 나는 괴물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기보다는 친근감과 연민을 느낀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끝내 외면하고 싶은, 그러나 결코 떨쳐낼 수 없는 내면의 음울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Lee Byung-chan’s Exhibition <Space Distortion>




A beautiful woman moving inside the cube a full of water actually exists in the space of the exhibit.

No, she is moving among real women, the space of the exhibition, and the visitors. It is one of the best digital installation works I have seen lately. These days, when substantiality (augmented reality) is brimming over, a variety of substantial existing things emerge according to essentiality and aspects of media.


Artist Lee Byung-chan created the organism, which can’t exist in a substantial contest, with motives and materials, which can be inferred in the existing space. Therefore, it is also of another Médium (an aspect of medium) different from one that makes non-existent things, which are mentioned above. Existents based on real space tend to communicate in both ways and have the same contextual Médium to the existing existents. Digital media installation becomes involved in the group of existents through communication and interaction with the existing existents but also have the characteristics of different existing existents.


The contemporary existence created by artist Lee Byung-chan is characterized by the presentation of a new existent through the materials that represent deserted forms and the social Wertfreiheit (value free) of capitalism. In addition, contemporary existence emphasizes homogeneous Médium breathing with the flow of the air that occupies the dense space, along with the sounds created by the movement, in the respect that it communicates in the same space. Therefore,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contemporary existence is not in line with the kinds of existents projected into the space of reality through the confirmation of a visual existent and acoustic Médium delivered through digital sounds.


If we say that the new kind of new existent is determined by where existence and non-existence (or digital and analogue) come into contact with each other and how they share the category of Médium for existing existents on the same line of the contact, Lee Byung-chan’s art works should be understood as being re-generated on the basis of the existing Médium by transforming individuals that the social Wertfreiheit (value free) of capitalism tailored. In addition, his works is deemed to extend another communicational Médium of a new existent through spatial distortion. The expansion of Médium brought various changes into the line of the contracts between digital and analogues, which have been considered as existing criteria and consequently unfolded the possibility of a new existent not stuffed to a point of the line, but as something evolving and seeking the contact point of communication. That is why his works are interesting to us.



Kim Ki-hong

Chairman of French Institute of Architects



공간왜곡 서론, 건축가 김기홍


물이 차 있는 큐브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전시공간에 실재한다.

아니, 실존하는 여성과 그녀의 움직임이 실재하는 전시공간과 관람객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근래에 본 디지털 설치작품 중에 존재의 생성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실재화(증강현실)가 범람하는 오늘날 미디어의 본질과 양태에 따라 다양한 실존류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병찬작가는 실존할 수 없는 맥락상의 유기체를 현존하는 공간에서 유추할 수 있는 motive와 재료를 통해서 창조시킨다.

이는 위에서 말한 부재의 실존을 만드는 방법과는 또 다른 메디움(매개체 양태)을 지니고 있다.

현실공간에 기초한 실존은 양방향 소통을 가지며 기존의 실존과 같은 맥락의 메디움을 가지려 하는 성격을 띤다.

디지털 미디어설치는 기존의 실존들과의 소통과 반응을 통해 실존의 그룹에 포함되며, 기존의 메디움과 다른 특정한 불 소통을 통해 또 다른 실존류로써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이병찬작가가 탄생시킨 동시대의 실존은 이질적 형상과 폐기된 자본주의 사회의 몰가치성을 대표하는 재료를 통해 새로운 실존류를 선보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더불어 같은 공간 안에서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움직임에 의해 발생하는 사운드와 함께, 밀도 있게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숨을 쉬고 있다는 동질적 소통 메디움을 강조한다.

이는 단지 시각적인 존재의 확증과 디지털 사운드를 통한 청각적인 메디움의 확장을 통한 현실공간으로의 투영이 보여주는 실존류와는 괘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실재과 비실재(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접점이 어디에 위치하고, 그 위치선상에서 기존의 실존들과의 메디움의 카테고리를 어떻게 공유, 소통하는지가 신 존재의 실존류를 결정짓는 잣대라고 한다면,

이병찬 작가의 작품은 기존의 메디움을 바탕으로 자본사회에 몰가치화로 재단된 개체의 변이를 통한 재생성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이병찬작가의 작품에는 공간의 왜곡을 통해 신 존재의 소통 메디움의 또 하나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 메디움의 확장은 결국 기존의 잣대로 여겨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접점들의 선상에 접점의 다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단지 어느 선상에 삽입된 박제된 실존류의 움직임이 아니라,

소통의 접점들을 찾아가는 진화하는 실존류로써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더 흥미롭다.






Space Distortion, 

Lee Byung-chan



One day, a trader around my workshop talked to me.

“Could it (Makok district) be better if it develops?”

Come to think of it, I saw there were many placards inviting investors around the town.

They were simply hassles to me but sweet giant candy bars to them.

How come they are already counting their chickens even when they don’t know how wild Makok district would be? They say that a matter with enormous mass is distorting the time and space of the periphery. It is like the peripheral space of Makok district is being already pulled by something invisible. Invisible, it’s like a black hole that does not exists though it does exist.


In a city, reversely, a black hole is turning into a matter with a tremendous mass. It is the cement mass piled up on bare ground where nothing can be seen. My school was in a village whose residents wear Dubai costum play. It has nothing to see but tall cranes. The villagers worship land just like a god and have blind expectations of spatial change. Then, one day, long and giant cement blocks appeared in the village. They got excited. It seemed as if their prayers had been answered. Elongated apartments changed the village. Uncountable placards ware hung and the term “The Town of Economy” was being used carelessly.


The schools in the neighborhood said they could become famous for high quality education at last.

Now, the long cement mass is no normal cement.

The cement space was like a hatchery that could activate functions that even SimCity can’t perform.

Like creeps gathering around a hatchery, the commodities breathing in consumption ecology started to transform the area. One difference from the creeps and the hatchery from the cement is that the latter is a cult-figure in consumption ecology while the hatchery that spread creeps is not the object of worship to the crabs. The cement is like a modern and contemporary god, not the old one in the Middle East.








-공간왜곡, 작업노트 이병찬


어느 날 작업실 주변 상인이 말했다.

“마곡지구가 개발되면 동네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동네 곳곳으로 여기저기 걸려있는 마곡지구 투자현수막이 많이 있었다.

나에게는 단지 길막하는 짜증나는 현수막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초대형 사탕 같았다.

허허벌판인 마곡지구가 어떻게 될 줄 알고 벌써부터 그런 기대를 하는 걸까.

우주에서는 엄청난 질량을 지닌 물체가 주변 시공간을 왜곡하고 있다고 한다.

마곡지구 근처로 아직 보이지도 않는 물체에 벌써부터 공간이 끌어당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볼 수 없기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블랙홀처럼 말이다.


도시에서는 반대로 블랙홀이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체로 바뀌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맨땅에 거대 시멘트 덩어리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두바이 코스프레 하는 동네에 있었다. 길쭉한 크레인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네였지만 사람들은 땅을 신처럼 숭배하며 공간변화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동네에 길쭉하고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신나했다. 기우제 끝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숭배의 보람을 찾은 듯했다. 길쭉한 아파트는 동네를 변화시켰다. 일대에 수많은 투자 현수막이 걸렸고 여기저기 경제도시라는 문구가 남발됐다.

그 주변에 있던 학교는 이제 질 좋은 교육 서비스로 유명한 학교가 되겠다고 했다.

이제 그 길쭉한 시멘트는 단순한 시멘트가 아닌 것 같았다.

심시티에서도 해낼 수 없는 기능들을 활성화시키는 시멘트는 마치 해처리 같았다.

해처리 주변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크립들처럼 소비생태계에서의 상품은 그 일대를 변모시켜나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립을 퍼트리는 해처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닌데, 소비생태계에서는 숭배의 대상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낡은 중동의 신이 아닌 현대적이고 근대적인 신으로 말이다.










2015 'The Illusion in the Mirror'

(Corner Art Space), SEOUL



'The Illusion in the Mirror‘ 리뷰글

코너아트스페이스 2015-글쟁이 노진구


과거에 비교해보자면 현대의 예술가는 무당에 가까울 것이다. 이 세계에 적을 두고 저 세계와 소통하는 무당처럼 예술가는 현실과 다른 다양한 채널을 넘나든다. 무당이 엑토플라즘을 통해 영적인 것을 표현하듯 예술가가 본 허상은 작품의 형태를 빌어 이 세계에 현현한다. 현실공간에서 예술적 공간이 펼쳐질 때 우리가 느끼는 기이한 느낌, 혹은 당혹스러움은 어쩌면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무언가를 볼 때에 느끼는 이질감과 유사하다.

이병찬은 현실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발견한다. 그것은 소비의 생태계다. 소비의 먹이사슬을 따라 도시는 새로운 형태의 생태 피라미드를 이룬다.

이 피라미드는 상품 가격의 오름차순을 따라 철저하게 정렬된다. 최상층에는 당연히 가장 값비싸고 귀한 상품이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라미드의 최하층에는 무엇이 있을까?

동시대에 존재하는 직업군을 과거에 비교하자면 예술가는 차라리 무당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 세계에 적을 두고 저 세계의 존재와 소통하는 무당처럼 예술가는 현실에서 벗어난 다양한 채널을 보고 듣는다. 무당이 엑토플라즘을 통해 영적인 것을 표현하듯 예술가가 본 허상은 작품의 형태를 빌어 이 세계에 현현한다. 현실공간에서 예술적 공간이 펼쳐질 때 우리가 느끼는 기이한 느낌, 혹은 당혹스러움은 어쩌면 이 세계에 속하지는 않는 무언가를 볼 때의 이질감과 유사하다.

이병찬은 현실의 세계에서 소비의 생태계를 본다. 소비의 생태계 속에서는 모든 것은 상품이 되어 생태 피라미드를 이룬다. 이러한 생태 피라미드는 가격의 오름차순에 따라 철저하게 질서지어진다. 피라미드의 최상층은 당연히 가장 값비싸고 귀한 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피라미드의 최하층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곳에는 상품조차 될 수없는 쓰레기, 혹은 생태계의 배설물이 있다. 이렇듯 버려지고 쓸모없어진 폐기물 속에서 괴생명체가 탄생한다는 시나리오 하에 이병찬은 괴물 연작을 만든다.


지난 4월 간 코너아트스페스에 설치된 괴물도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코너아트스페이스 맞은편에는 현대백화점이 있고, 위층에는 성형외과가 있다.

현대백화점의 쇼윈도가 잘 정돈된 상품을 진열해놓은 것에 비해, 코너아트스페이스의 쇼윈도에는 거대한 괴물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

또한 성형외과가 인체의 아름다움을 추종한다면, 괴물의 몸뚱아리는 인체의 일부분을 기이하게 닮음으로써 그것을 조롱한다. 괴물은 소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배회하며 소비사회가 만드는 차별의식과 열등감, 조롱, 상품화된 신체의 이미지를 먹고 자란다.


괴물은 소비 사회가 만드는 엔트로피를 대변한다. 괴물은 단지 가치 없는 물건의 찌꺼기 속에서 우연히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소비의 최상위 계층에 속한 상품이 귀중함, 또는 유용함으로 스스로를 과시한다면, 다른 한쪽 편에는 전혀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다. 하나의 상품이 시장에 나오면 그로 인해 폐기되는 물건이 더 많아지듯 말이다. 따라서 괴물이 크고 기괴한 외모를 가질수록 다른 한 곳에서는 소비의 성벽이 높고 아름답게 세워진다.

이번 코너아트스페이스의 전시가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전시장 주변의 백화점과 성형외과를 작품의 상대역으로, 쉽게 말해 괴물의 발생조건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질적인 소비의 건축물을 작품과의 역동적인 관계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괴물이 과연 그 무서운 외관과 별개로 소비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미심쩍다. 비록 자본의 부정적인 정념을 먹고 자랐다고 하더라도 괴물 그 자체는 소비의 생태계에 기생하는 존재일 뿐이며, 그 내면에는 상위계층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만큼이나 부러움과 자기 연민을 드러낸다. 괴물이 가진 모순은 육중한 몸과 날카로워 보이는 발톱과 상반된 비닐이 주는 질량과 질감에서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색색의 비닐봉투와 공기로 이루어진 괴물의 몸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스스로를 스펙터클화한다. 이병찬은 쇼윈도에 진열된 괴물을 통해 사치와 소비로 점철된 ‘있는 자들의 세상’에 대하여 비틀어진 유머를 구사한다.









Lee Byung-chan’s Exhibition

<The Illusion in the Mirror>


Prologue, ji -yoon, yang


The Illusion in the Mirror

  Since 2003, Songdo international city, which is approximately 12 times the size of Yeouido, has been under construction in Yeonsu-gu, Incheon. A convention center, international schools, shopping malls, an ecological pavilion, golf courses, trade centers, multipurpose buildings, and parks are scheduled to be completed on reclaimed land by 2025. This new city is being constructed under attention from the media and national headlines including Favorable factors for development, Songdo’s bright prospects for its commercial zones, Chinese people surging into Songdo international city and Favorable factors in Songdo real estate.

  Byung-chan Lee, who went to university here, was deeply impressed by the power of capital that enables city development. The power of forming a city is concentrated on enhancing the value of its commodities. A capitalized city is a commodity, and the spaces created in a city are also commodities. Lee pays attention to the waste deriving from development earned from promotional banners created to sell apartments and officetels (small apartments for work and living in Korea), multi-purpose buildings with residential and commercial units and leaflets urging investment for high returns, and a huge amount of vinyl waste. From this, he imagined creating his own “living life forms” with abandoned vinyl envelops.

  At his first solo show in 2010, Lee presented an artificial ecosystem with the images of deer, flowers, and trees made from the brightly colored vinyl envelopes into which he blew air. He melted disposable vinyl envelopes with a lighter and gave them a sense of movement by filling them with air. His figurative sculptures modeled after natural forms are like organically deformed chimera. He entitled these works Urban Creatures, putting them in a stark contrast with the concrete buildings of Songdo.

  Artists have made sustained efforts to reveal the underlying spirit of things with imagination, surrealism, dreams, and contingency. Their acts of lending visible form to spirit are reminiscent of the goals of ancient alchemists. They presumed there was “spirit within matter.” This spirit inhabits animate objects. Lee sees the glass-capped cube of the Corner Art Space as a place of illusion where “urban creatures” dwell, raising common vinyl envelopes to the level of art by imbuing them with life. Those living their hectic lives in a city of desire and greed face the light these weird urban creatures radiate.





2014, 'Natural History Museum'

(72-10 Mullae-dong 1(il)-ga, Yeongdeungpo-gu), SEOUL

<Supported by SeMA, Seoul Museum of art>



Lee Byung-chan’s Exhibition <Natural History Museum>


Prologue, So-Young, Kim



City, Museum of Monster


City Where the Plastic Monster Resides

There was a dark and deep shadow. When I approached closer and took a look, it was heavily crumpled vinyl.

Wind blows. The black thing that laid thinly starts to make scrunching noise and inflate its body.

Gasping a fishy breath, the vinyl becomes a monster. The monster is shortly catching its breath.

It has been six years since Byung-Chan, Lee began to create monsters with disposable vinyl bag. It was around the creation of city Song-Do and when he witnessed massive vinyl trash coming out from this new city. The artist imagined of a creature that could be parasitic on the vicious cycle of the cities that are turning into an abnormal and depraved shape under the logics of development, and the endless flow of the vinyl from the continual consumption of the people.

This imagination was born as a mutant creature, between a dinosaur and a reindeer, and presented at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2010. The artist portrayed a city ecosystem full of mutants such as a large flower with fingers or a black creature with a body of a dinosaur and head of an ant. This was when he started to create some type of city memorial using the vinyl bags as his witness. These city memorial has progressed through many years, and mutated into Urban Creatures in 2011.


Human Emotions that Create Monster

The city creatures are about cosmopolitans who voluntarily make themselves the subject of consumption. Byung-Chan, Lee dreamed of monsters within the city, and utilized vinyl and motor fan to create them instead of the flesh and bones of the dead.

The skin surface that had been melted together through the hands of the artist and his lighter was expected to be light, and yet, it was heavy. Also, although it had an innate transparent quality, this was murky. The reason could be found in a statement by the artist. He said his works are crystallized from his own inferiority. This crystallized inferiority diversified according to the complex parade of the city.

The Urban Creatures that were made after his fourth exhibition (2013), have a different outcome than the previous ones drafted with abnormality. It went through another mutation. Their forms depict a bit more distant future and the skin surface are vivid plastic colors. The structural form became more vibrant than before.

To characterize Byung-Chan, Lee’s Urban Creatures, the visual qualities could be categorized into black and multi-colored organisms. By this year, his black creatures became more grandeur and the colored ones became more magnificent. The hysterical forms became calm, and the precarious movements are regaining a sense of weight. This is to say that the development of these monsters are vigorous and the artist is reflecting more positive emotions than the previous inferiority.


Somewhere at the End of the City.


Byung-Chan, Lee is facing his fifth exhibition, Natural History Museum. The works that will be displayed in the streets of Mullae-dong Steel Works are also a part of the Urban Creatures series, and the only difference is that the time period has certain fantasy elements. The current exhibition is based on the artist’s imagination that things are discovered only after experiencing the end, like the mermaid that was discovered in the northern sectors of Siberia.

It did not take long for the buried monsters to climb into the museum and walk around. They started to breath and shudder with a click of a power button. The skin surface made by their creator covers the inflating joints and initiated calculated movements. Also, the motor fan powered the monsters to breath in and out.

This exhibition had additional lighting as well. The monsters had lights within their body, and the lighting placed at various parts of the steel works rendered the same ambience of an excavation site. The glimmering lights piercing out of the monster’s skin blurred the boundaries of time and space.

The Urban Creatures will be unearthed by the people of the future. These creatures by Byung-Chan, Lee will be easily located in any continents.

What kind of message will it give about the present era? Borrowing from the artist’s imagination, it could render an era of mutants creation disregarding the existing ecosystem, or a time that produced mutants out of boredom in their copious redundancy.

City creatures and monsters regrow. Byung-Chan, Lee’s vinyls are cultivating in peculiar shapes within the city. Soon, some cities will be entrenched, and those that stop progressing will be buried under the sand.




'Natural History Museum’ 서론, 2014


도시, 괴물의 박물관

-김소영 큐레이터


플라스틱괴물이 기생하는 도시


어둡고 깊은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다. 한 발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잔뜩 쭈그러진 검은 비닐이다.

바람이 든다. 얇게 펼쳐있던 껌정이 사박거리며 몸을 부풀린다. 고개를 든다.

비릿한 숨을 내쉬며 비닐은 괴물이 된다. 괴물은 잠시 숨을 고른다.

이병찬이 일회용 비닐로 괴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약 육년전이다. 송도라는 도시의 탄생과 그로 인해 대량으로 밀려나오는 비닐쓰레기를 목격한 그 즈음부터다. 개발논리로 인해 기형적이고 부도덕하게 변하는 도시, 계속해서 소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비닐, 작가는 이 악순환의 어딘가에서 기생하고 있을 생명체를 상상했다.

이 상상은 2010년 첫 개인전에서 공룡과 순록의 중간 쯤 되는 모습의 변이체變異體로 태어났다. 손가락이 달린 거대한 꽃, 공룡의 다리와 개의 머리를 지닌 검은 생물 등 작가는 돌연변이로 가득한 도시 생태계를 구현하였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비닐봉지를 증거품삼아 현대도시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수년간에 걸친 도시 기록물들은 2011년 도시생명체 Urban Creatures로 변종變種 되었다.



괴물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감정


도시생명체 작업은 스스로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도시인들에 대한 것이다. 이병찬은 도시를 배경으로 괴물을 상상했고 죽은자의 뼈와 피부 대신 비닐과 모터 팬으로 창조해냈다. 작가의 손과 일회용 라이터로 이어진 표피들은 필시 가벼워야함에도 무거웠고, 투명한 특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탁했다.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면 언제인가 작가가 말 한 것처럼, 본인의 열등감에서 수정受精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정된 열등감은 도시안 복잡한 행렬에 따라 분화한다. 그리고 도시와 인간 사이 위태로운 구조 위에서 괴물로 탄생된다.

이병찬의 네 번째 개인전(2013) 이후 제작된 도시생명체 작업은 뒤틀린 채 배아 되었던 이전과 달리 미래를 향하고 있다. 한 번 더 변이가 이루어진 형태, 조금 먼 미래 어디서인가 볼 수 있을 형태로, 선명한 플라스틱 색깔들을 표피에 띄우고 있다. 이전 작업들에 비해 모양새도 더욱 화려하다.

이병찬의 도시생명체 작업은 시각적인 특징으로 검은생명체와 다채색 생명체로 구분 할 수 있다. 올해들어 작가의 검은 괴물들은 장엄해졌고 여러 색깔의 괴물들은 찬란해졌다. 신경질적이던 행태는 차분해졌고, 위태롭던 움직임은 무게감을 찾아간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괴물의 성장이 거칠 것 없이 힘차다는 것이고 작가 또한 열등감이 아닌 건강한 감정을 괴물에 투사한다는 것일 거다.



도시 끝 어딘가에서


이병찬은 다섯번째 개인전 <자연사박물관>을 앞두고 있다. 문래동 철강소 거리에서 선보이게 될 작업들 역시 도시생명체 연작으로, 단지 시대에 있어 판타지적 설정이 있다. 이번에 선보이게 될 전시는 마치 현재 시베리아 북극지역에서 발견되는 매머드 같이, 끝을 경험한 후의 미래에서 발굴된다는 작가의 상상을전제로 한다.  

땅 속에 묻혀있던 괴물이 박물관에 들어와 다시 움직이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치않다. 탈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원을 올리면 괴물은 숨을 들이마시며 꿈틀대기 시작한다. 창조자에 의해 재단된 표피들은 팽창하는 마디마디를 감싸 계산된 움직임으로 이끌고, 모터 팬이 들숨과 날숨을 쉬며 괴물의 동력을 만든다.

이번 전시는 특별히 빛이 더해졌다. 괴물들은 몸 안에 빛을 품고 있고, 철강소 곳곳에 설치된 조명은 마치 발굴현장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괴물의 표피를 뚫고 나오는 각기 다른 색의 어른거리는 불빛은 시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언젠가 미래인들에게 발굴되는 도시생명체. 비닐로 만들어진 이병찬의 괴물들은  어느 대륙에서든지 쉬 발견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현재는 어떤 정의가 내려질까. 작가의 상상을 빌어본다면, 기존의 자연계를 무시하고 변형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대일 수도, 넘치는 풍요가 따분하기 그지없어 기이한 변종을 만들어낸 시대로 평가 받을 수도 있겠다.

도시생명체, 괴물은 다시 자란다. 이병찬의 비닐은 도시 속에서 기묘한 형태를 그리며 성장하고 있다. 조만간 몇몇은 도시를 잠식 할 것이고, 성장을 멈춘 몇몇은 흙 속에 파묻힐 것이다.







문래동의 한 철강소를 점령한 괴물 생명체들

이병찬 <자연사 박물관>, 립 2014.10.3 ~ 10.24


미술세계 , 2014,11, 경기도문화의전당 정윤희


날카로운 기계음과 철가루 먼지를 신나게 내면서 바쁘게 돌아가던 공장들도 일을 마치고 셔터를 내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는 곳. 마치 한물갔거나 퇴색되어 버렸거나 문을 닫아버린 세계인양 단숨에 탈바꿈해버리는 그곳이 문래동 철강소이다. 문래동 철강소가 집합되어 있는 거리 한 중간, 잠시 휴업을 하고 있는 한 공간에 위치한 전시장을 찾았을 때도 이 지역에는 이렇듯 음산한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철재문이나 유리문 대신 찢어진 검정 봉지로 대충 마감되어 있었던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깜짝 놀랄만한 장면이 펼쳐진다.


SF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광경이었다. 괴상하고 거대한 생명체들이 흐느적거리며 어두침침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버림받고 지하 하수구 동굴로 숨어들어가, 온갖 더러운 오물을 먹으며 끈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살아가던 생물체가, 욕망에 휩싸인 한 이기적인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위험한 화학 물질을 피부에 접하고 말아 거대하고 괴상하게 변종되어 버린 형태랄까. 형형색색의 비닐 풍선들이 곤충의 다리, 더듬이, 날개, 비늘처럼 마구 붙여지고 더해져서 기형적으로 확장되었다. 이 기괴한 풍선 괴물은 품속에 진주알 같은 조명을 품고 있었고,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을 타고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정말 살아있는 외계 생명체와 같은 인상을 준다. 작품들은 철강소의 계단, 인부들의 휴게실, 휴게실에 걸려있는 빨랫줄과 2층 가장 구석진 공간에까지 기가 막히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까진 이 동네 철강소가 대부분 활발히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요즘 같은 첨단 사회에서는 한물간 업종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며, 주변에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면서 부터는 주민들로부터 흉물 취급을 받기도 하기 때문에, 전시장 내에는 한물 간 과거와 SF 영화 속 미래가 공존하며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따지고 보면 격동의 소용돌이와 거친 삶의 현장 속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단상도 이와 같지 않을까. 빠르게 변화하고 거칠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강인한 정신력과 생존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필요 이상의 소비를 통해 보상 받는다. 우리는 겉치장과 허세를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 되는 것 마냥, 위협적인 존재인 것 마냥, 혹은 쿨하고 세련된 도시인인 것 마냥 행세하지만 이들 작품들의 소재가 속 빈 비닐 풍선인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도 사실 텅 비어 있고, 작품 속 비닐 풍선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냉혹하고 잔인한 소외와 슈퍼스타에게 쏟아지는 찬사 사이를 롤러코스터로 오고가며 위험천만한 일상을 견디며 살아간다.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모습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에서 줄곧 보아왔었고, 그 시작점에는 모던 사회와 대중사회의 탄생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서구 사회와 실정이 다른 우리 사회에서 과거 이 철강소가 전투적인 직업의 삶과 세련된 도시의 삶을 모두 영위했던 모던 보이들의 터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전시는 찰리 채플린 영화 속의 공장건물, 흑백 영상에 등장하는 탄광촌의 이미지, 팝아트, SF 영화 속의 괴물 생명체 등 다양한 이미지와 개념들과 공명하면서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려도 좋을 만한, 일종의 표징을 지니고 있다.






2013, ‘Laputa' (Multipurpose Art EMU), SEOUL

라퓨타, 쓰레기 봉지들의 섬 - 박수진 (복합문화공간 에무 디렉터)

비닐, 생물과 무생물 사이

사물이 생겼다. 인간이 만든 이 사물은 무성생식을 하듯이 급속도로 수가 늘어갔으며 다양한 종으로 진화해갔다. 오늘도 나는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이 사물들이 한 개, 두 개 늘고 어느새 양 손 가득 이 사물이 들려져 있다. 농촌지역에서 이 사물은 엄청난 규모로 번식하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물결치는 생명력, 그리고 장엄한 최후까지 숭고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 이 사물은 일상생활, 농업, 산업 활동을 넘어서 예술작품까지 점령한다. 홍상수 영화 <밤과 낮>에서 남자주인공 손에 들려서 그의 찌질한 삶과 성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기도 하고, 광안리 바닷가에는 노란색, 파란색으로 변신하여 바람을 맞으며 마치 식물처럼 사람들을 반긴다.1)이쯤 되면 이 사물의 명칭이 무엇인지 짐작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닐봉지라 불리는 플라스틱 백이다. 이처럼 비닐봉지는 탄생 이후 우리 삶과 환경 깊숙이 들어와 있고 엄청난 속도로 만들어지고 폐기되고 또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이병찬의 작품은 바로 이 비닐봉지의 이야기이다.


비닐, 쓰레기의 귀환

작가에 따르면 그가 비닐을 작품 소재로 만나게 된 계기는 “송도”와 관계가 깊다고 한다. 매일 그가 바라봤던 송도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한때는 잘 나갔었다고 전해지는, 서해안 최대 규모의 해수욕장이었던 송도는 짙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늙어버린 창녀 같다. 쇠락한 송도유원지 옆으로 번쩍이면서 새로 들어서는 높은 건물들, 국제신도시 송도의 모습에서 40년대 인공 모래사장이 조성되고 온갖 새롭고 흥미롭던 것이 넘쳐나던 송도해수욕장이 겹쳐진다. 폐기와 건설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생태적 순환일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쓰레기가 양산된다. 작가는 송도에는 유난히 산업폐기물로 버려진 비닐들, 바닷물에 쓸려오는 비닐봉지들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이 쓰레기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뤄지는 행태와 자연생태들과의 유사성이 있다. 한때 유용한 물건이었던 비닐은 쓰레기가 되면 바다, 강, 호수에 가라앉아서 물을 오염시키고 땅속에서 쉽게 썩거나 분해되니 않아 환경문제를 야기시키고, 때로는 태워져서 대기를 오염시키는 위험한 물건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그 위험한 귀환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젊은 청년들이 일자리로부터 소외되면서 잉여가 되는 현실에서는 그들의 저항과 귀환을 상상하고 있다. 경제발전과 지구화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들은 사물, 자연, 인간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쓰레기로 내몬다. 그는 이 비닐에서 젊은 청년들의 미래, 지구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들의 저항과 귀환의 통쾌함과 두려움을 쓰레기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프랑케슈타인의 최후는?

이병찬의 작품제작과정은 마치 검정 비닐봉지가 무성번식을 하듯이 붙여가는 방식을 이룬다. 그는 봉지 하나하나를 라이터 불로 붙여서 이어 붙인다. 그렇게 무한번식해가는 비닐봉지들은 인공의 숨을 들이킨다. 인간이 창조해낸 하나의 사물이 괴물이 되어서 되돌아온 순간이다.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케슈타인에서 진짜 괴물은 그 괴물을 만들어낸 과학자 빅터 프랑케슈타인일 것이다. 이병찬은 비닐 생물체에게 라퓨타라는 제목을 붙였다. 미야자치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로 널리 알려진 라퓨타는 하늘을 떠다니는 첨단과학의 결정체이다. 또한 자연의 낙원이며 동시에 대량학살용 무기가 장착된 성이다. 원래 이 라퓨타는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허구의 나라이기도 하다.2)미야자기 하야오가 라퓨타에서 과학의 위험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묻는 질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이다. 또한 쓰레기의 저항과 귀환 역시 생각해봐야할 문제일 것이다. 여기에는 근거 없는 희망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가치와 윤리, 그리고 행위의 선택만이 놓여있다. 그 선택에 따라서 인간과 지구의 역사는 “최후에 쓰레기만이 있었다.”가 현실이 될 것이다.





1) “낭비”를 주제로 한 2008년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에 출품됐던 홍현숙 작가의 작품.


2) 조너선 스위프트는 하늘을 날아다닌 섬의 왕 라퓨타의 이름에 여러 가지 언어놀이를 한다. 책에서는 라퓨타 사람들은 ‘랖’은 ‘높다’. ‘운트’는 ‘군주’를 뜻하는 것으로 두 단어가 합쳐 라퓨타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la puta(라 푸타)”는 스페인어로 “창녀”를 뜻한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린달리노의 라퓨타에 저항을 그려넣기도 했다.